부의금 파문(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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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김종필 민자당 대표가 난처하게 됐다. 고 정일권씨의 장래위원장으로 모자라는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대기업으로부터 1억원의 부의금을 거둔 것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구설수를 겪고 있다.
하기야 김 대표로서는 좋은 일을 한다고 했을 것이다. 고인의 화려한 경력에 걸맞은 성대한 사회장으로 치러야겠는데 정부보조는 2천만원 뿐이고,그렇다고 사회장을 하면서 부의금을 받는 것은 고인에 대한 예의도 아닌 것 같고,신문 광고비만도 6천만원이 넘었다니 무슨 비상수단을 강구했어야만 했을 것이다. 그래서 「좋은 일」에 총대를 멘다는 생각으로 가장 손쉽게 5대기업에 부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알려지면서 『기업 돈 뜯어 장례를 치르다니…』 『재벌에 손 내밀었다』는 말이 나오고 부도덕하다느니,구태의연하다는 비난이 쏟아진 것이다. 대통령은 기업으로부터 한푼도 안받겠다고 하는데 제2인자라는 사람이 그런 개혁의지는 커녕 기업에 손을 벌릴 수 있느냐는 것이다. 청와대의 한 비서관은 『JP(김 대표)는 참 희한하다』고 불만스러 했다는 말도 들린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돈을 전달한 전경련도 야박하다는 생각이 든다. 경위야 어쨌든 부의금으로 낸 돈에 영수증을 달라고 했다니 상식적인 감각으로는 각박하다는 느낌이 안 들 수 없다. 이런 식이라면 앞으로 보통사람들의 결혼식·장례식에서도 축의금·부의금을 내고는 영수증을 써달라고 하는 일은 없을지 모르겠다.
결국 이번 파문을 보면 세상이 참 무섭게 변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과거엔 있을 법한 일도 이젠 자칫 부도덕이나 구태가 될 수도 있고 전에는 통하던 관례도 시빗거리가 되는 경우가 잦다. 해선 안될 일과 해도 괜찮은 일에 대한 불별과 사려가 절실히 필요하게 됐다.
그러나 이번 일에 한가지 분명한 것은 김 대표는 우리가 벗어나려는 과거에서 아직 채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런 김 대표에 비해 전경련측은 너무도 재빨리 벗어났다는 점이 두드러진다고 할까.
앞으로도 사회장은 있을 터인데 장례비용이 모자라면 부의금도 받고 행사규모를 줄이는 수 밖에 없겠다. 이번 일은 누가 어떤 명목으로도 기업에 손을 내밀어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확고히 심어준 공로(?)만은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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