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가 있는 아침 ] - '밥 먹는 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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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정호승(1950~) '밥 먹는 법' 전문

밥상 앞에
무릎을 꿇지 말 것
눈물로 만든 밥보다
모래로 만든 밥을 먼저 먹을 것

무엇보다도
전시된 밥은 먹지 말 것
먹더라도 혼자 먹을 것
아니면 차라리 굶을 것
굶어서 가벼워질 것

때때로
바람 부는 날이면
풀잎을 햇살에 비벼 먹을 것
그래도 배가 고프면
입을 없앨 것



음력 갑신년 원단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또 한번 새해 첫날의 비나리를 할 수 있음은 행복한 일이다. 새해에는 가난하지만 따뜻하고 맛있는 밥을 먹자. 풀잎을 햇살에 비벼 먹을지언정 남의 쌀독을 기웃거리거나 남의 밥을 빼앗을 생각일랑 말자. 조금씩 지닌 것도 서로 나누며 많이 고생한 이웃들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바다 건너온 어려운 살붙이 형제들의 밥상 위에도 희고 눈부신 밥 한 그릇을 놓자.

곽재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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