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비즈] 여자가 영업? 17년 만에 ‘선수’ 됐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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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1990년 3월. 대학을 갓 졸업하고 생활용품업체 한국P&G(옛 서통P&G)에 영업사원으로 들어간 황진선(41·사진)씨는 서울 은평구와 서대문구의 작은 수퍼마켓을 훑고 다녔다. 가게에 P&G의 샴푸와 기저귀 등을 들이는 게 임무였다. 당시만 해도 ‘영업 맨’은 있어도 ‘영업 우먼’은 드물었다. 그해 업계 처음으로 여성 영업사원을 뽑았다고 해서 이 회사가 화제가 될 정도였다.

 처음에는 ‘여자가 무슨 영업이냐’는 비아냥이나 ‘밥이나 한 끼 먹자’는 치근거림의 대상이기 일쑤였다. ‘아침부터 재수 없게 여자가 찾아온다’며 가게 앞에 소금을 뿌려대는 이를 만났을 땐 눈물도 찔끔 났다.

 한국P&G의 글로벌 영업 매니저인 황진선 이사의 17년 영업 인생의 시작은 이처럼 순탄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상점 주인들이 바라는 대로 함께 술 마시고 밥 먹거나, 물건 값을 깎아주는 대신 상권과 고객 정보를 체계적으로 수집해 거래처 사장들을 설득했다. ‘왜 P&G 제품을 들여놓는 게 이득인지’를 논리적으로 설명했다.

거래처 매출이 오르고, 자신의 실적도 쌓이면서 영업소장·영업기획부장·영업이사로 차근차근 올라갔다. 급기야 글로벌 인재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호주 시드니 법인에서 2년간 근무한 데 이어 지금은 일본 도쿄에 상주하면서 글로벌 영업 전략을 짜고 있다.

 영업은 남성의 일이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글로벌 영업 전문가로 도약한 그의 성공담이 『나는 프로페셔널이다』라는 신간에 담겨 있다. 황 이사는 “영업은 단순히 물건을 파는 행위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상대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라고 나름대로 정의했다. 따라서 영업 이외의 일을 하는 이들도 ‘영업 마인드’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영업에 발을 들여놓은 계기부터 도전적이었다. “대학(이화여대 경영학과) 시절 은행·증권·광고 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사회가 남녀를 달리 대우한다는 걸 어렴풋이 알게 됐어요. 영업은 객관적인 수치로 검증을 받을 수 있어 오히려 차별을 덜 받으면서 진정한 프로가 될 수 있겠다 싶었어요.”

 영업은 목표에 이르는 지름길이라는 생각도 했다. 근래 영업을 가장 중시하는 기업 최고경영자들이 늘면서 영업직의 활동 영역이 더 넓어졌다는 것. 영업은 청년실업의 탈출구도 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구직자들이 채용 인원이 많은 영업직을 기피하고, 덜 뽑는 마케팅·기획·인사관리 분야를 선호한다는 게 안타깝다는 지적이다.

 대학 교수인 남편과의 사이에 1남1녀를 둔 그에게 일과 가정의 균형을 유지하는 건 오랜 숙제다.

의외로 ‘수퍼우먼’의 이데올로기에 현혹되지 말 것을 당부했다. “회사와 가정, 양쪽에 완벽하게 충실한 여성의 이미지는 사회가 조장하는 것이에요. 남편과 가족의 도움 없이 이 자리까지 오지 못했을 거예요.” 그래서 커리어 우먼들을 만나면 “힘들면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 열심히 손을 벌리라”고 조언한다고 한다.

박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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