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민호기자의문학터치] 폭력 지배하는 사회에서의 생존법 <10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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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① 군대에서 태권도 승단 대회를 앞두고 졸병의 가랑이를 찢는다.

② 먼 나라에 나갔다가 아무 죄도 안 지었는데 감금당한다.

③ 다니지도 않은 대학에 동문 선배 자격으로 강연을 한다.

④ 72조 원이 넘는 돈이 하루 만에 흔적없이 사라진다.

정답은, 안타깝게도 ①이다. ①을 제외한 나머지 예는, 요 며칠 도하 언론이 앞다퉈 대서특필한 사건이다. ①만이 허구의 산물이다. 하나 다른 사건에 비하면 한참 싱겁다. 경악과 충격의 나날 속에서 우리는 그만큼 무뎌진 것이다. 세상은 이미 소설보다 더 소설답다. 즉 세상은, 우리가 실감하는 것보다 훨씬 끔찍하고 참혹하다. 소설가 백가흠(33)에 따르면 세상은 진작에 나락이다.

백가흠의 두 번째 창작집 『조대리의 트렁크』(창비)가 나왔다. 앞서 ①은 이 책에 수록된 단편 ‘루시의 연인’에 나오는 일화다. 주인공 준호는 군대에서 가랑이를 찢다가 신경마저 끊겨 평생을 불구로 산다. 백가흠은 이태 전 첫 창작집에서도 준호와 비슷한 인생을 꾸역꾸역 그려냈다. 백가흠이 기용한 인물들은 하나같이 불구였다. 몸만 아니라 마음도 성치 못 했다.

이번에 백가흠이 선발한 면면 역시 만만치 않다. 기형으로 태어난 신생아를 여관에 버리고 달아난 부모, 치매 걸린 노모를 자동차 트렁크에 두고 달아난 아들, 아이를 단칸방에 가둬 끝내 굶어 죽게끔 내몬 엄마, 아기를 가질 수 없어 영아납치를 청부한 여자, 사랑과 집착을 구분 못 하는 스토커 남자 등속이다.

중요한 건, 이들이 작가의 상상이 낳은 해괴망측한 괴물이 아니란 사실이다. 작가는 이들을 언론 보도를 보고 형상화했다. 작가가 한 일이라면, 이들에게 캐릭터를 입히고 이야기를 얹힌 것뿐이다.

유독 인상적인 캐릭터가 있다. ‘굿바이 투 로맨스’에 등장하는 두 여자, 미주와 영숙씨다. 두 여자 모두 한 스토커 남자에 의해 갇혀서 산다. 어지간한 외출은 금지돼 있고, 전화를 제때 받지 않으면 무자비한 폭력이 돌아온다. 그러나 그들은 도망치지 못한다. “왜 도망칠 생각을 않는 거야? 사랑이라도 하는 거야?”라며 서로 나무라면서도 그들은 남자에게 순종한다. 백가흠의 인물은 이렇듯이, 세상이 불합리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 앞에서 무기력하다. 세상의 부조리를 인식하지 못하고 죽는 인물은 ‘웰컴 마미’에서 엄마를 기다리다 굶어 죽는 아이뿐이다.

백가흠에 따르면 폭력은 일종의 제도다. 함부로 거역할 수 없기에 폭력은 객관적이고 강고한 제도다. 예컨대 준호의 가랑이를 찢은 이들은 친절한 고참이었다. 그들에겐 태권도 승단대회 전원 합격의 전통을 이으려는 선의만 있었을 따름이다. 그러나 준호는 평생을 불구로 산다.

애초부터 우리에겐 선택권 같은 게 없었다. 어찌 됐든 제도 안에서 살아야 하므로, 우리는 폭력에 맞설 수 없다. 맞서려면 제도 밖으로 걸어나갈 용기가 전제되어야 한다. 하나 그건 더 겁나는 일이다. 차라리 제도 안에서 폭력을 수긍하며 사는 게 나을지 모른다. 그렇게 적당히 종속돼, 복종하고 체념하면서 사는 거다. 그래서 백가흠은 슬프다. 피눈물이 난다.

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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