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장단과 「주범·종범」(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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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널리 알려진대로 영국 국회의장의 권위는 대단하다. 의장이 회의장에 입장할 때는 모든 의원들이 기립하며 의장이 자리에 앉으면 의원들은 모두 허리를 굽혀 경의를 표한다. 의장이 자리에서 일어서면 모든 의원은 입을 다물고 자리에 앉아야 한다. 영국의회에서도 더러 여야 격돌과 소란이 벌어지기도 하지만 의장이 일어서서 그저 「질서 질서」 두마디만 하면 조용해진다. 의장이 자리에서 일어서는 모습이 얼마나 근엄한지 명재상이었던 디즈렐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의장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의장석에서 일어설 때 의장복의 옷깃 스치는 소리만으로도 놀란 의원들이 고개를 떨구었다­.』
영국 의장의 이런 권위는 그저 나오는게 아니다. 의장은 항상 초당적 입장에 서며 추호의 의혹을 사는 일도 하지 않는다. 특정 의원과 특별한 친교도 갖지 않으며 원내 식당이나 휴게실에 가는 법도 없다.
이런 영국의회 의장만큼은 아니더라도 국회의장은 어느 나라나 존중받는다. 우리나라 역시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최근 우리 국회의 의장단에서는 보통사람들조차 듣기 거북한 말들이 나오고 있다. 『주범은 그대로 있는데 종범만 덤터기를 쓰느냐­.』 이게 무슨 소리인가.
이 말은 작년말 정기국회에서 날치기를 하려다 실패했던 황낙주부의장이 자신의 사회를 야당이 거부한데 대한 불만을 표시한 것이다. 당시 국회의장 대신 날치기 사회의 악역을 맡았던 자기는 종범이라는 얘기다.
황 부의장은 결국 이번 임시국회에서는 사회를 보지 않기로 했는데 날치기 파동이래 사이가 나빠진 이만섭 국회의장과는 14대 국회 후반의 의장직을 놓고도 경합중이어서 이래저래 불편한 관계라고 한다.
국회의장단에서 나오는 이런 소리들을 들어보면 영국의회만은 못하더라도 왜 우리 국회는 이처럼 체통도 위신도 없는가 하는 새삼스런 개탄을 금할 수 없다. 따져보면 날치기가 유죄지만 의장단이 「범」자 소리를 들어서야 되겠는가. 그리고 여야 모두 창피한 기억일 수 밖에 없는 날치기 미수를 몇달씩이나 들먹이며 감정싸움하는 것을 보면 우리 정계는 왜 좀 더 대범하고 넉넉하고 훈훈한 모습이 없는지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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