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시대>36.장 폴 사르트르 著,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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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1905년 파리에서 출생 ▲1924년 파리고등사범학교 입학▲1929년 철학교수 자격시험 합격 ▲1938년 소설『구토』발표 ▲1945년『현대』誌 창간 ▲1952년 작가 카뮈와 논쟁 ▲1964년 노벨문학상 수상 거부 ▲1980년 급성폐기종으로 타계 장 폴 사르트르가 1963년에 발표한『말』은 20세기 프랑스지성을 대표하는 그 자신의 어린 시절을 되돌아본 자서전 형식을 취하고 있다.
끊임없이 문학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문제를 던졌던 사르트르의정신사적 고백은 확실히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책은 보통 자서전에서 흔히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을 별로 만족시켜주지 못한다.거기에는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누구나 품게 마련인 향수가 전혀 없다.설사 어려운 성장기를 보낸사람일지라도 그것을 회고할 때는 시간적 격차가 만들어내는 심리적인 편안함에 의존해 어느 정도 덧칠을 하게 마련인데도 사르트르에게는 이런 류의 안온한 회고취 미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이 책을 특징짓는 것은 신랄한 자기비판과 가족들의 부르좌적 위선에 대한 야유다.「깡패같다」는 형용이 어울릴 정도로자신의 유년기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혹독하다.이미 50줄을 넘어선 사르트르가 자신의 문학적.정치적 입장에서 유년기를 돌아보며 쓴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 아마도 역사상 가장 공격적인(!)자서전이라 할만하다.
사르트르는 자신의 유년기를 돌아보면서 일종의 정신분석학적 방법을 원용한다.그러나 여기서「정신분석학적 방법」이란 프로이트의그것을 전면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다.그는 프로이트가 말하는무의식의 억압에 저항해온 입장이었다.다시 말하 면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결정론적인 국면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그는 태어나자마자 해군장교인 아버지가 죽는 불운을 겪는다.한번도 아버지를 보지못한 그는 그러나 자신이「애비없는 자식」임을오히려 자랑스럽다는듯이 쓰고있다.그는『아버지의 죽음이 나에게는자유를 주었다』고 말한다.그는 가족과 전통적인 권위의 무거운 짐으로부터 해방돼 자신을 임의로 만들어 나갈수 있는 특권적인 지위를 태어나면서부터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그에게는 자신을 검열할 초자아가 없었다.더구나 어린 나이에 졸지에 과부가 돼버린 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하면서 인생을 시작한 그에게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생길 틈도 없었다.「인간은 자유롭도록 저주받은존재」라는 그의 일생을 지배한 명제는 바로 이러한 출생의 상황에 뿌리를 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무제한의 자유가 계속될 수는 없었다.처녀나 다름없는 그의 어머니 안느 마리는 어린 장 폴을 데리고 친정집에들어가게 되고 이때부터 사르트르는 외할아버지라는 권위와 어떤 형태로든 대면하지 않으면 안됐다.
그의 외조부 샤를르 슈바이처(그는 유명한 목사이자 의사인 알베르트 슈바이처의 숙부다)에게 어린 장 폴의 등장은「삶의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이 근엄한 고전문학 애호가는「죽음의 공포를 황홀감으로 극복하기 위해」손자에게 홀리고 반한 할아버지로 변모한다.귀여운 손자의 재롱을 보면서 그는 죽음의 그림자를 떨치고 싶었던 것이다.
영리한 꼬마 장 폴은 할아버지와 일종의 묵계를 맺 고 그의 노리개감이 되어준다.그는 할아버지의 맘에 들도록 일부러 말과 행동을 꾸미고 할아버지는 그 대가로 손자에 대해「인자한 신」이 돼주는 것이다.그래서 장 폴은 책에서 읽은 뜻도 잘 모르는 말을 뇌까려서 어른들을 놀라게 하거나 때 로는 계집애처럼 얌전을피우는 이른바 「희극배우」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자신이『허상 내지는 여분의 존재가 아닌가』하는 의문에 빠지게 된다.위선으로 가득찬 집안 분위기속에서 자신은 신동이자 귀염둥이로 대접받지만 사실은 이것이 가족들의 부르좌적인 자부심을 충족시켜 주기 위 한 것 이외의 아무것도 아님을 그는 눈치챈다.
외조부와의 교류가 그에게 부정적인 면만을 남긴 것은 아니다.
외조부는 문학에 대해 거의 종교적이라 할만큼 경의를 가진 사람이었다.낡은 책더미에 둘러싸여 고전문학을 읽는 할아버지의 모습에서 어린 장 폴은「교직을 하나의 성직으로,그리고 문학을 하나의 열정으로 취급하도록」일찍부터 훈련받는다.
또한 수많은 문학서가 수북이 쌓여있는 할아버지의 서재를 놀이터로 삼게되면서 그는「말」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뜻도 모르는 책을 뒤적이면서 그는 바깥세상의 부피와 다양성을배운다.그래서 현실은 그에게 항상 관념으로 주어진다.「지식에서출발해 사물로 향하는」이러한 학습과정은 그로 하여금 말로 설명된 현실이 실제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것으로 보이게 했다.
자기존재의 정당성에 대한 추구는 일찍부터 말의 위력을 깨달은이 소년을 자연스럽게 글쓰기의 세계로 유도한다.무언가를 씀으로써 세계를 구성할수 있다는 발견은 그에게 엄청난 희열을 안겨준다.『쓴다는 것은 내게 있어 종교와도 같은 것이 되었다』는 그의 말대로 문학은 곧 그를 초월적 위치로 끌어올려주는 마법과 같은 것이었다.
50년대 내내 사르트르는 문학을 통한 사회변혁을 생각해왔다.
이른바 앙가주망(참여)문학의 이론을 펴면서「펜이 칼이 될수 있음」을 주장해 왔다.60년대 초에 쓰여진『말』은 그가 이러한 문학의 혁명적 가능성에 어느 정도 한계를 느끼기 시작한 시기에발표됐다.다시 말하면 이 책은 자신의 문학적 삶의 결산이자 문학에의 고별사이기도 했다.『굶주림에 떠는 아프리카의 아이들에게나의 문학은 아무 의미도 없다』면서 그는 문학적 창조보다는 직접 현실에 대응하는 길을 모색한다 .
그러나 그는 문학의 현실적인 힘에 대해 절망했는지는 모르지만한번도 말의 힘에 대해 희망을 버린 적은 없었다.그래서『문화는아무도 구원해주지 못하지만 인간은 그 문화속에서 자신을 비추며자신을 찾는다』는 그의 말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감동적으로 읽힌다.
〈林載喆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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