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사태 각본따른 반란-장태원 前수경사령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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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12.12는 두개의 드라마로 구성돼 있다.전반부는 鄭昇和육군참모총장의 연행과정에서 발생한 충돌이며,후반부는 鄭총장편의 육본측과 全斗煥보안사령관의 합수본부측의 긴박한 대치와 군동원이다.패자측은 12.12를 사전에 면밀히 준비된 쿠데 타라고 주장한다.승자측은 朴正熙대통령시해사건을 수사하기 위한 鄭총장 연행때의 우발적 충돌로 시작된 것이라고 반론을 펴왔다.군출동에 있어서도 양측은 상대방이 먼저 동원했고 자신들의 부대동원은 불가피한 자위행위라고 맞서왔다.이들의 상반 되는 주장은 문민정부가12.12를「쿠데타적 사건」으로 규정한 것과 별도로 여전히 평행선을 긋고있다.만 14년이 되는 이 시점에서 이들의 입장을 추적해본다.
張泰玩前수경사령관(62.現한국증권전산회장)은 12.12때 全斗煥보안사령관세력에 실질적으로 맞섰던 거의 유일한 高位지휘관이었다(鄭柄宙당시특전사령관도 있었으나 그의 역할은 작았다).
그리고 그는 14년후 12.12세력에 대한 내란죄 고소를 주도했다. 11일 기자가 그를 만난 곳은 청와대.景福宮등이 정면으로 내려다 보이는 플라자호텔 꼭대기 레스토랑이었다.그는 12.12세력이 집결했던 경복궁내 30경비단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카랑카랑한 목소리로『12.12는 國基를 엎은 반란이자 쿠데타』라는 성토를 반복했다.
-12.12를 왜 반란으로 규정하나.
『그들은 崔圭夏대통령을 협박하고 鄭昇和계엄사령관을 불법 연행하는 하극상을 저질렀고 상사의 승인없이 군대를 동원했으며 국가주요시설을 탈취했다.그리고 金五郎소령(특전사령관비서실장)등 동료군인을 살해했다.결론적으로 그들은 권력을 잡을 흉 계를 지니고 작당하여 병기를 휴대하고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12.12세력이 謀反을 사전에 계획했다고 주장하는 근거는.
『보안사 西氷庫분실에서 풀려나기 직전인 80년 2월5일 나는全장군을 만났다.
그때 全장군은「鄭昇和총장이 총장직을 내놓고 6개월정도 집에서쉬고있으면 대사나 장관,또는 그보다 더한 자리를 보장해드리려 했다」고 말했다.또 「張선배님도 12.12 당일밤 그러지만(저항하지만)않았어도 다음날 중장으로 진급시켜 군단 장으로 내보내려 했다」는 얘기까지 털어놓았다.이런 점으로 보더라도 그들은 사전에 준비했던 것이다.』 -12.12세력은 육군본부와 수경사쪽에서 먼저 병력을 동원했다고 주장하는데.
『그들이 먼저 병력을 이용해 鄭계엄사령관을 불법 연행.구금했다.육군본부나 수경사는 그같은 반란행위가 발생하면 자동적으로 병력을 동원,진압하도록 되어있다.그것은 움직일수 없는 의무다.
반면 합수부는 수사만 하도록되어 있는 참모부다.그런 데도 그들은 전방부대를 포함해 무장병력을 서울로 끌어들였다.』 -12.
12세력은 지금도『鄭총장을 수사하기 위해 연행하다 생겨난 우발적 충돌』이라고 말한다.
『왜 법대로 하지 않았나.그들은 이미 수도권 주요부대의 지휘관을 30경비단에 모아놓지 않았는가.나중에라도 鄭총장의 10.
26관련혐의가 드러난게 있는가.그들은 언제까지 국민을 속일 참인가.』 -진압계획은 어떻게 세웠나.
『나는 수도기계화사단.26사단.9공수여단을 동원하려했다.
30경비단을 직접 공격하려면 곡사火器를 쏴야하는데 그러면 그일대 민간인 거주지역이 불바다가 됐을 것이다.그래서 진압병력으로 景福宮일대를 포위한 후 전기.수도를 차단하고 그 다음날(12월13일)투항을 설득하려 했다.그래도 저항하면 헬기를 투입해가스탄을 쏘고 특공대가 반란군 장군들을 공격하면 간단히 끝낼 수 있을 걸로 믿었다.그런데 불행하게도 병력동원에 실패했다.』-왜 병력을 동원하지 못했나.
『컴퓨터 바이러스처럼 하나회가 침투해 軍통수권을 장악해 버렸기 때문이다.내가 지휘한 수경사만 보더라도 4개단장중 張世東30단장.金振永33단장.趙洪헌병단장이 반란군쪽이었고 黃東煥방공포병단장만 남았다.
26사단.수도기계화사단은 李建榮 당시 3군사령관(現 民自黨의원)이「盧載鉉 국방장관을 찾을수 없어 동원허가를 받지 못하겠다」고 했고 9공수여단은 출동하다가 보안사의 설득으로 주저앉고 말았다. 내 휘하의 수경사 병력에 반란군을 모두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이를 받들어 반란군을 공격한 것은 국방부 옥상에있던 발칸포대 하나 뿐이었다.私조직 하나회가 軍을 틀어쥐고 있었던 것이다.』 -검찰이 진행하고 있는 고소사건수사가 12.12의 진실을 규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12.12같은 반란이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된다.재발을 막으려면 철저한 진상조사가 이루어져야 한다.반란주체세력이 권력을 잡았던 5共,6共내내 그들은 국민을 철저히 속였다.문민정부는 그 기만의 껍질을 벗겨 진실을 국민에게 알릴 책임 이 있다.고소를 함으로써 나는 나의 역할을 다했다.이제부터는 정부가 해야한다.』 -12.12세력에 하고 싶은 말은.
『나는 수경사령관으로서 반란을 진압하지 못한 것을 여러번 국민에게 속죄한다고 했다.그런데 그들은 왜 한번도 반란을 속죄하지 않는가.』 張씨는 12.12의 비극을 가장 아프게 겪은 사람이다.12.12의 충격과 후유증으로 부친은 80년 4월 작고했고,서울대 1학년생이던 외아들은 82년 1월 자살했다.
그는『내 불행에 앞서 국가의 치욕이었다』고 울분을 토로하고 있다.그는 내년4월께 있을 재향군인회 회장선거에서 하나회쪽과 가까운 鄭鎬根 前합참의장과 뜨거운 표대결을 벌일 참이다.
〈金 璡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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