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수출첨병 겸하는 외국대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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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19일 저녁 영국대사관저 안뜰에서는 영국의 수많은 옷.잡화회사중 하나인 던힐사의 패션쇼가 열렸다.이 패션쇼는 던힐사 창립1백주년을 기념해 열린 행사로 유통업 관계자등과 패션담당 기자들을 위해 마련된 자리였다.이 자리에서 데이비드 J 라이트 駐韓영국대사는 주최자로서 손님을 맞았고 쇼 서두에 던힐사의 상품과 그 우수성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만년필.라이터.위스키.옷등 국가적 차원에서 볼 때는 잡동사니에 불과한 상품들을 만들어내는 일개 사기업에 대한 이러한 국가적 차원의 배려(?)덕분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상품가치 이상의 감동과 신뢰(?)를 느낄수 있었다.그러나 영국대사 관의 이런 행사는 그다지 희귀한 것은 아니다.전날은 스카치 위스키를 팔러온 스코틀랜드 주정부 상무장관이 대사관저에서 기자회견을 하기도했다. 자국물건을 팔기 위한 이런 식의 국가적 지원은 비단 영국만의 얘기는 아니다.얼마전 프랑스 미테랑대통령도 고속철도인 TGV를 위해 노구를 이끌고 방한했던 것을 기억할 수 있다.지난해 프랑스 디자이너 쿠레주의 한국패션쇼에 앞서 있었던 기자회견에는 프랑스정부의 상무담당관이 참석해 국가 명예를 걸고 품질을 보증하기도 했다.
걸어다니는 광고판인 이탈리아 베네통사 루치아노 베네통 사장이현재 한국에 와 있고,다음달에는 크리스천 디오르.이브 생로랑 사장이 내한한다.이밖에도 미치코 런던.랑콤등 다국적 기업들이 직수출과 함께 본격적인 홍보전에 돌입했다.이의 선전을 위해 주한대사관들까지 설치고 나서는 것은 물론이다.지난 7월말 유통시장 개방후 패션시장만 봐도 과거 구한말 열강의 각축장을 방불케할 지경이다.
이에 비한다면 우리나라는 참으로 점잖다.값싼 옷이 아닌 패션을 팔아보겠다며 자기돈 들여 파리컬렉션에 참석한 우리나라의 모디자이너는「파리에서 대사께 인사도 드리고 왔다」고 자랑할 정도다.「나팔이 울어야 원님이 지나간다」는 말이 있 다.나팔수가 힘껏 나팔을 불어주지 않으면 원님이 지나가도 주목을 끌지 못한다. 패션등 고급품들은 그 물건의 품질뿐 아니라 브랜드의 신뢰도를 따지게 된다.해외에서는 특히 생산국의 이미지는 그 신뢰도를 높여주는 데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선진국들이 우리와 다른 것은 브랜드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나팔수 역할을 충실히 하는 사람들(외교관)이 있다는 점이다.한국 현지외교관들은 나팔수인지 원님인지 새정부에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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