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사회에 역행하는 현실(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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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자본주의 경제가 심화되고 시장활동이 활발해지는 하나의 중요한 척도는 신용거래의 비중이 높아지는 것이다. 대부분의 선진국이 후기산업사회로 발전하면서 현금위주의 경제에서 크레딧 카드와 개인수표 등 현금없는 경제로 발전해 왔다.
실명제와 공직자 재산공개로 우리 사회는 당연히 신용사회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서 역행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실명제 실시이후 이미 퇴장된 현금통화가 1조7천억원이 넘는다는 조사가 보고되었다. 올 상반기중 제도금융권을 빠져나간 현금통화의 규모도 1조원이 넘는다.
실명제가 갖는 중요한 의미중 하나가 금융거래의 실명화에 따른 개인신용의 확립과 자료에 의한 거래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이같은 장기적 효과는 기대하기 어려운 것 같다. 우선 은행이 지급을 보증하는 자기앞수표조차 유통이 잘 안되고 있다. 많은 사람이 서로 현금거래를 고집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 거래비용을 가져오고,거래규모 자체를 위축시키는지 그 효율성을 잘 생각해봐야 한다.
실명제나 공직자 재산공개가 현금선호 풍조를 가져온 이유는 정치적인 측면에서의 불가칙성과 경제적 측면에서의 정책에 대한 불신때문일 것이다. 여기에 불안정한 상황을 느끼면 지나치게 민감하게 대응하는 국민의식도 문제가 된다.
원칙적으로 현금을 과다하게 보유하는 것은 다름 금융상품에 비해 유동성이 크다는 이유 말고는 수익면에서 불리하고 거추장스럽다. 그래서 실명제 실시를 관장하는 정부내에서는 언젠가는 제도금융권에 환류되지 별수 있겠느냐고 낙관하는 모양이다. 이런 안이한 견해로는 실명제를 정착시키기 어렵다. 정부가 해야할 일은 국민이 실명제에 선뜻 동참하지 않는다고 볼멘 소리를 할 것이 아니라 참여할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유독 현금을 선호하고,아직도 개인신용이 정착되지 않은 것은 반드시 실명제 때문만은 아니다. 워낙 과거의 변화속도와 내용이 빠르고 크다 보니 항상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려는게 일반적인 국민정서다. 따라서 실명제와 공직자 재산등록 및 공개로 현금선호풍조가 가속화한 것은 분리해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아직 실명화기간이 상당히 남아있는데도 현금통화 보유가 늘고 자금순환에서 빠지고 있다는 사실은 10월12일이후 30조에 이른다는 비실명 금융자산의 동향과 관련해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만약 현금형태로 다량인출이 일어나 퇴장된다면 그만큼 거래자체가 위축될 뿐 아니라 통화관리에 누적적으로 큰 부담을 주기 때문이다.
정부는 다량 현금인출을 막기 위해 자료를 국세청에 통보하는 등의 대비를 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래도 안되면 화폐개혁이 불가피하지 않느냐는 근거불명의 추측도 계속 나돌고 있다. 왜 실명제를 비롯한 정부정책이 신용사회로 나아가야 할 길을 막게 됐는지 심사숙고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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