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그여자의4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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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2.여름 새 두 마리(22) 신호등이 고장이 난 것일까,새벽에서 아파트 앞까지 어떻게 왔는지 은서 자신도 모르겠는데,아파트로 건너가는 건널목의 신호등 붉은불이 영 바뀌질 않는다.
한참을 기다려도 붉은등은 파란등으로 바뀔 생각을 안해 그냥 건너려고 발을 차도에 내려놓는데 그녀의 무릎이 꺾이고 그대로 신호등 아래 앉아져 버린다.
마루에 걸터앉듯 그녀는 인도에서 차도로 내려가는 턱에 가만 앉아있다.
밤이 깊어 인적이 드물다.바뀌지 않는 붉은 신호등 아래로 생각난듯이 자동차가 한 두대씩 지나갈 뿐이다.저만큼 술에 취한듯중년의 사내가 고개를 떨어뜨리다,뭐라고 흥얼거리다,팔을 내젓다가 할 뿐이다.
아주 먼 길을 나갔다가 오는듯 그녀는 너무 피로해서 거기 주저앉자 일어설 힘이 없다.일어서야지,마음을 먹는데도 그건 생각일 뿐 일어서지질 않는다.
그녀는 고갤 들어 하늘을 봤다.저게 하늘 맞을까? 건물들 위로 그저 희끄무레한 공동이 떠 있다.하늘에서 시선을 거두는데 온몸에 오한이 든다.방금까지 이마에 송글송글 땀이 맺혀 있었던게 금세 가시고 입술이 떨려온다.
이젠 어떻게 해야 하나,은서는 핑그르 눈물이 돌아 앉은 자리에서 무릎을 싸안는데,누가 어깨를 툭 친다.
『은서씨 아니에요?』 화연이다.화연이 신호등이 내비치는 불빛아래 의아한 눈빛으로 서 있다가 은서 옆에 같이 앉으며 은서의얼굴을 들여다본다.
『왜 여기 앉아 있어요?』 화연은 처음엔 호기심으로 은서를 들여다보다가 은서가 바들바들 떨고 있자,이런,하면서 손을 잡아일으켜 세운다.
『왜 이렇게 떨어요? 추워요? 자 일어나요.내가 데려다줄게.
』 화연이 은서를 부축해 길을 건너는데,신호등 아래 화연이 내려놓은 비닐봉지와 은서가 내려놓은 핸드백이,그대로 놓여져 있다.그녀들이 건널목을 다 건너갈 때까지도 신호등은 붉은 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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