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패외투 벗기는 「햇볕식」 개혁/김영배(중앙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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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어느 유수한 기업의 한 간부에게서 최근 이런 말을 들었다. 주로 정부나 국영기업체를 상대하는 그는 새 정부가 들어선 후 준엄한 개혁조치로 상위직은 그런대로 「개혁적」이 됐다고 평가했다. 과거처럼 손벌리는 일도 없고 그런 내색도 아예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위직으로 가면 분위기가 상당히 다르다고 했다. 심지어 『먹고 죽자』며 노골적으로 나오는 경우도 없지 않다고 했다.
○견디기 힘든 하위직들
그는 이런 현상을 이렇게 해석했다. 상위자는 과거 부패가 일상화됐던 「그 좋던 시절」의 가장 큰 수혜자다. 그에게는 이 동절기를 넘길 지방분이 비축되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앞으로의 신분보장이나 출세 등을 생각하면 좀 고생이 되더라도 참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위직들의 경우는 상황이 다르다. 지난 날의 부패구조 속에서는 거의 누구든지 비정상적인 수입원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공공연하게 양해되다시피 되어 있던 제도화된 부패구조였다. 그런데 그것이 어느날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하루 이틀은 견딜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거의 체질화되어 있던,비정상적인 분배구조를 바탕으로 이뤄졌던 생계의 수단이 끊어졌으니 이판사핀식으로 나오는 것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이런 것이 공직사회 전체의 일반화된 분위기라고 주장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엄격한 개혁의 진행과정에서 이처럼 은폐되어 있던 이중구조의 괴리상태가 밖으로 불거져 나올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어찌보면 과거 잘못된 구조의 수혜자들이 사정한파 속에서도 그럭저럭 버티고 있다는 것,그리고 지난날 부패의 맛에 길들여진 입버릇들이 여전하다는 것들은 사정적 개혁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내재된 불만들이 자칫하면 개혁의 은근한 걸림돌이 되고 부패구조를 회생시키는 잠복 요인이 될 수도 있다. 때문에 개혁을 영속화 시킬 수 있고 공정한 게임의 룰을 만들 수 있도록 개혁의 제도화·입법화가 요구됐었던 것이다.
○사회적 재생력 맡겨야
이제 정부는 실명제라는 수술도를 들고 과거의 부패구조에 대한 「개복수술」을 시작했다. 이것은 아마도 개혁을 제도화하는 가장 마지막 단계가 될 것이다.
이것을 두고 준비소홀이니,지나친 공권력 의존이니 온갖 소리가 나오고 있다. 수술 시기가 과연 적기였는지,집도의는 자격을 감췄는지 하는 시비도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그런 논의는 이미 실명제가 실시된 상황에서는 한갖 군소리에 불과하다.
김영삼정부로서는 다른 시기를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경제에 충격을 줘서는 안된다는 안정론자들의 주장에 따르자면 지금과 같은 침체된 상황에서 실명제를 실시한다는 것은 분명 도박이다. 실명제에 대한 지금의 반발을 고려한다면 그의 임기가 지나면 지날수록 실명제는 더 실시하기가 어려워질 것이다. 개혁과 경제성장,두마리의 토끼중에 어느 것이 더 우선이냐는 것은 끝없는 논쟁거리일 수 있다. 하지만 이미 그것은 선택이 되어진 상황이다.
따라서 그것을 어떻게 성공적으로 정착시키느냐는 것이 남아있는 과제일 뿐이다. 혹자는 이왕 개복이 되었으니 차제에 썩은 장기를 샅샅이 도려내고 더러운 피를 말끔히 갈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실명제가 「사정적인 개혁」의 가장 철저한 수단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자금출처를 모두 조사해서 과거의 비리를 몽땅 들러내고 처벌한다면 속시원해 할 사람들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조치의 목표가 애당초 경제라는 환자의 치료에 있었다면 그 수술은 가장 시급한 부분을 빠른 시간 안에 씻어내고 끝내야 한다는 주장이 온당할 것이다. 현미경을 들이대고 부패와 부정의 모든 병균을 모조리 잡아내기보다는 병근의 핵심을 잘아내고 나머지는 사회적 재생력으로 자연스럽게 치유되게 맡겨야 할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자금의 출처를 불문하고 가명자금의 실명화에 모든 정책의 초점이 두어져야 한다는 경실련의 주장이 옳은 것 같다. 가명자금에 대한 징벌은 과세로 충분할 것이다.
문제는 그런 자금이 또다시 퇴장되고 음성화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며 경제적 충격을 장기화하는 관망기간을 최소한으로 단축하는 조치들이 더욱 긴요한 것이다.
○지하자금 저절로 나와
실명제가 가명속에 은닉되어 있는 부패구조와 청산과 사회적 윤리성의 확보를 가장 큰 목표로 삼는다면 그것은 과거를 지하 구조로 더욱 움츠러들게 하는 「북풍식 개혁」이 아니라,썩은 과거의 외투를 절로 벗기는 「햇볕식 개혁」의 도구가 되어야만 할 것이다.<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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