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정치자금」 발 못붙인다/실명제로 달라질 정치행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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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공천장사 불가능… 의원후원회등 활성화/「돈줄」의존 탈피 소신있는 의정활동 기대
금융실명제 실시는 정치행태와 제도의 대변혁을 초래할 것이 확실하다. 당장 실시되는 금융거래의 실명화는 우선 정치권의 정치자금 수수·관리방식에 큰 변화를 줄 것이다. 특히 그 시점이 공직자 재산등록 직후여서 재산등록에서 동산 자산을 누락한 정치인과 관료들에 대한 제2의 사정 가능성도 없지않다.
실명제 실시는 또 정당운영·선거에도 심대한 영향을 줄 것이라는 지적이다. 결국 실명제는 깨끗하고 노력하는 정치인·정당을 생산하고 공명한 선거풍토를 조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는게 정치권과 학계의 공통된 예측이다.
손학규(민자)·이해찬(민주)의원과 김석준 이대교수(정치행정학) 등은 실명제의 가장 직접적인 효과로 정치권의 「검은 돈」 수수관행의 근절을 든다. 즉 실명제 실시로 웬만한 정치자금의 흐름은 노출되고 말 것이므로 정치인·정당은 투명한 돈을 찾아나설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앞으로는 국고보조·후원회 등을 통한 정치자금 모금과 정당의 당비 징수가 활발해질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이런 식으로 자꾸 정치자금 양성화가 이뤄지면 정경유착·이권개입 등은 많이 사라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정치자금 모금 관행의 변화는 정치인·정당 활동에도 즉각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우선 정치인은 예년처럼 검은 뭉칫돈을 넙죽넙죽 받아 챙길 수 없기 때문에 경조사비·지구당 운영비 등 씀씀이를 대폭 줄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반면 후원회원을 끌어들이기 위해 의정활동 등을 보다 돋보이게 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정당도 기탁금·후원회비를 많이 모으기 위해 정책개발에 크게 신경쓰는 등 변신하지 않을 수 없다. 또 고정비용이 많이 드는 「공룡조직」에 대한 정비도 불가피할지 모른다. 이와 관련,시·도지부 및 지구당존폐 문제가 앞으로 정당법개정 과정에서 진지한 논의대상이 될 가능성이 크다. 황명수 민자당 사무총장은 이미 이런 방향의 추진을 시사했다.
실명제 실시로 정당의 민주화도 촉진될 것으로 기대된다. 왜냐하면 이제까지는 주로 음성자금을 잘 끌어모아 쓰는 능력의 소유자가 당을 좌지우지해온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으로는 정치인들이 당내의 「돈줄」에 의존하기 보다는 의정활동 강화 등 자신의 노력에 의해 합법적인 자금을 조달하려 할 것이므로 당에서 좀더 소신있는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것이다.
정당의 「전국구의원·공천 장사」 폐습도 상당히 개선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야당의 경우 공천·전국구후보 인선을 통한 대규모 정치헌금 모금이 주수입원이었고 정치자금에 관한한 여당보다 더욱 은밀한 조달방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당분간 어려운 살림을 감내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또 선거행태도 많이 바뀔 것이다. 과거처럼 수십억원의 큰 돈을 마련하기도 어렵거니와 법정선거 비용을 초과해 마구 뿌리기도 꺼림직한 상황이 도래할 것이기 때문이다. 돈을 못쓰게 되면 혼탁·과열의 주범격인 조직선거는 거의 어렵게 된다. 결국 후보자들은 정책·공약·경륜·인품 등을 내걸고 경쟁하는 시대를 맞게 될 것이며 「10당 9락」같은 선거용어는 사라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때문에 실명제는 금권정치·선거와 금권의 정치권력화를 뿌리뽑고 막는 역할을 톡톡히 할 것이라는 관측이다.
이같이 예측되는 변화의 양상에 맞추어 여야는 정치자금법·정당법·선거법 등 정치관계법 개정작업에 바로 착수키로 합의했다.
한편 실명제는 제2의 정치권 파동을 야기할지 모른다. 재력가 의원들중 적지않은 의원들이 가명·차명계좌는 신고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따라서 의원들은 감춰둔 돈을 포기하지 않는한 그 돈의 형성과정에 대한 추적이 가능하다. 또 이에 앞서 재산등록의 성실성·도덕성이 문제될 것이다. 이 경우 정치권은 지난번 재산공개 파동에 이어 또 한 차례 큰 홍역을 치를지도 모른다.<이상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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