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표 던지던 날…』시집 낸 홍영순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여자나이 49세.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서 비로소 자기성찰을 할 나이다. 가정에만 몰두해온 주부들이 자기상실의 고통을 호소하며 정신병원에 입원하거나 가출을 하거나, 이렇게 극단적으로 가지 않더라도 극심한 정신적 방황에 시달리는 넘기기 힘든 마의 나이대(?)다.
그러나 주부들에게 「자아실현의 표본」처럼 보이는 전문직 여성들에게도 이 나이는 위기의 나이다. 최근 외국인회사에서 전문비서일을 하다 사직한 뒤 『내가 사표를 내던 날은 하늘도 울었고 땅도 울었다』는 시집을 펴낸 홍영순씨(49)는 직장여성의 위기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제 그대 얼굴에/책임을 져야하는 마지막 나이」(자화상) 「세상에 나와/49세가 되면/그대 나이에 맞는/명함을 요구합니다」(출세가).
『문득 뒤돌아보니 함께 시작한 남자들은 모두 이사·상무가 돼 있는데 나만 비서실에 앉아 한 걸음도 더 나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55세 정년까지 이대로 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끔찍했습니다. 정년퇴직 후 찾아올 허탈감도 겁이 났지요.』
그는 지난 5월 결단을 내리고 사표를 냈다. 이것을 그는 시에서 「지금/떠나지 못하면/끝까지/꽁꽁 매이리라」(사표3)고 표현했다.
그가 사표를 낸 데는 명예퇴직이 권장되는 회사분위기와 회사생활 때문에 고3 아들의 뒷바라지도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자책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그가 직장에 다니던 동안의 가정생활은 그야말로 전쟁이었다.
「일주일동안/못했던 일을 하느라/전쟁을 치르듯/몇 톤의 물을 쓰며/삘래하고/청소하고/반찬 장만하고/목욕하고….」(DAY7) 「나의 하느님은/내 아파트앞 상가/반찬가게아줌마」(반찬가게 아줌마).
이렇게 생활조차 정착하지 못하고 달려왔던 생활에 막을 내리고 들어앉은 집안에서 그는 또 다른 거북함을 느껴야 했다. 이것을 그는「낮시간을/나 없이 지내온 내 집은/퇴직한 나를 거북해 한다」(DAY4)고 읊었다.
그는 67년 서강대영문과를 졸업, 20년 넘게 외국관계기관의 비서로 일해왔다. 85년 여성문학인회 주최의 여성백일장에서 입상한 후 짬짬이 시를 써온 그는 윤종건 교수(50·한국외국어대 교육학과)와 사이에 1녀1남을 두고 있다. <선>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