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진근로자의 끝없는 절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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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22일 낮 서울 종로구 관철동 산업은행본점(구 삼일빌딩)앞.
7대의 전세버스에 나눠탄 원진레이온 근로자 3백여명이 도착하자 산업은행 경비원들과 인근 카페·상점들은 익숙하게 출입문 셔터를 내렸다.
『직업병 해결없이 한국병 해결 웬말이냐.』
『고통분담 외침속에 원진노동자 다 죽는다.』
정부가 지난달 8일 공장폐쇄를 결정한뒤 원진노동자들은 이곳에서만 6번째 시위를 벌였다. 민자당사·국회·정부종합청사 등 각계 요로로 돌아다니며 굳게 닫힌 철문앞에서 목소리를 높인 항의방문까지 치면 12번째 「원정」에 나선 셈이다.
이들이 산은을 찾은 것은 원진레이온이 적자에 허덕이던 81년 부터 이 회사의 법정관리를 맡아온 산은측이 정부의 공장폐쇄조치에 따라 집단 해고된 근로자 8백10명에게 「법대로」 퇴직금과 3개월치 해고수당을 지급하겠다고 통보했기 때문이다.
『퇴직금을 받는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취직을 위해 회사에 들어가려 해도 「직업병환자가 병원에나 갈것이지 이곳에는 왜 왔냐」며 받아주질 않아요.』
『원진에 근무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탄로나」 해고된 사람이 올해에만 3명입니다. 결혼날을 잡아놓고도 「원진에 근무한 것을 안 부모님 반대가 완강하다」며 「없던 일로 하자」며 결혼상대자에게 퇴짜맞은 경우도 있습니다.』
생산부서에서 8년간 근무했다는 신현태씨(33)는 『폐업이 불가피하다면 정부가 취업을 알선하든가 재취업을 위한 직업훈련대책을 세워줘야 할텐데 노동부와 산은은 서로 미룰 뿐』이라며 답답해 했다.
한때 산업역군으로 공해에 찌든 삶의 터전에서도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다가 신경제 구호의 뒷전에 밀려 「용도폐기」된 원진노동자들이 정녕 웃는 낯으로 정든 직장을 떠날 수는 없을까. 『안쓰럽다』는 말을 남기고 시위현장을 총총걸음으로 피해가는 시민들의 표정에서 대책없는 원진사태를 보는 외부시각이 엿보였다.<최상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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