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과 애국(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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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1942년 4월 도쿄 히비야 공회당에서 열린 전일본 신인음악회에서 하얀 치마저고리를 입고 『봉선화』를 열창한 소프라노 김천애는 조선인들에게 열렬한 환호와 벅찬 감동을 안겨준다. 무사시노 음악학교를 졸업한 김천애는 다음해 귀국해 고향 삼천포에서 귀국 공연회를 가지려했지만 일제에 의해 『봉선화』는 금지가요가 되고 공연도 취소되었다. 이후부터 「봉선화=홍난파=민족음악가」라는 고정관념이 생겨났다.
그러나 최근 「친일파 99인」이라는 책 광고가 신문에 실리면서 일반인도 『아! 홍난파도 친일파였나』하는 깨달음을 갖게 된다. 43세의 짧은 삶을 그는 음악만을 위해 살았지만 그의 음악은 식민지하의 민족현실과는 무관한 음악가였다고 그의 친일 이력서 작성자는 평가하고 있다. 그는 경성방송국 양악부 책임자로서 관현악단 조직 및 지휘,경성 음악전문학교 교수 등으로 조선악단의 우뚝한 존재였지만 그의 친일화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대구형무소를 다녀온 뒤부터 본격화된다.
39년 경성방송 제1방송을 통해 홍난파가 지휘하고 경성방송 관현악단이 연주한 「애국가곡집」이 방송되었다. 물론 여기에서 애국은 일본 국왕에 대한 애국이었고 가사 제목도 「황국정신을 되새기며」 「애마진군가」 「태평양행진곡」 등 태평양 전쟁군가 일색으로 꾸며진 노래였다.
「일어나거라 우리 임금님의 분부 받아 새로운 세계 이룩하고 대아시아 공영권의 우리 일장기 날리는 곳이 자자손손 복누릴 국토」라는 내용의 가곡이 이광수 작사 홍난파 작곡의 『희망의 아침』이다. 봉선화와는 너무나 다른 음악가의 변신과 변절을 보는 것이다. 그러나 어찌 홍난파 뿐인가. 최근 보훈처가 밝힌 자료에 따르면 광복후 독립유공자로 표창받았던 상당수의 「애국자」들이 사실은 일제하의 친일파였다는 혐의가 있어 이에 대한 조사를 벌이고 있다 한다. 일본 밀정 노릇을 하고 총독부 경무국장의 촉탁까지 지낸 사람이 광복회 회장을 했다는 혐의도 있고,학병지원을 권유하는 글과 강연을 한 사람이 버젓이 애국자로 국가 표창을 받았다는 것이다. 세상이 어찌 이토록 어리숙한가. 우리가 과거청산에 그토록 맺고 끊는 엄밀성이 없다한들 친일파가 애국자로 둔갑할 수 있는가. 굴신과 배반의 딱한 사연들이 사람마다 있겠지만 적어도 친일의 명백한 족적을 남긴 사람마저 국가의 공식문서에 애국자로 등재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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