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늘방석”노 전대통령/“백담사가 따로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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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사정추위 견뎠는데 율곡파문 또 엄습/「학생체포대」 등쌀에 외출때도 전전긍긍/손님까지줄어… 대구로 이사할곳 물색
『김종휘 외교안보 수석비서관이 미국에서 시간을 끌수록 의혹은 커질텐데…. 빨리 돌아와서 해명하는게 좋겠다는 뜻을 전하시오.』
8일 노태우 전 대통령은 정해창 전 비서실장을 연희동 자택으로 불러 이같이 지시했다.
2월25일 퇴임이후 연희동집 담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노 전 대통령이 「조치」를 취한 것은 이 건이 처음이었다. 박철언·김종인씨가 감옥으로 가고 친구 이원조씨가 외국으로 튀어 세상이 시끄러워도 그는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딸 소영씨부부의 「20만달러사건」의 경우 부끄럽고 속이 상했겠지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율곡비리 태풍만큼은 사정이 다른 모양이다. 위기를 느끼고 있음이 뚜렷하다. 율곡파동은 그 근원을 캘 경우 측근 몇몇의 개인비리 차원으로 끝날 일이 아니다. 「6공청와대」의 도덕성과 책임으로 연결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외교안보참모가 대통령이 결재한 전력증강사업에서 거액을 챙겼다면 6공정권은 변명하기가 힘들어진다.
한 핵심측근은 9일 『이번 건은 정말 심각하다. 노 전 대통령도 다른 사건과 다르게 느끼는 것 같다. 빨리 진상이 발혀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노 전 대통령 뿐만 아니라 정 전 실장·김종권 전 정무·이병기 전 수석도 마찬가지로 판단하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은 김종휘 전 수석에 대해 평소 강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 김 전 수석은 4월30일 출국하기전 정용후 전 공군 참모총장이 F­16문제를 터뜨렸을때 직접 노 전 대통령에게 「문제없음」을 강조했다고 한다.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각하,F­16을 결재하실 때도 제가 설명을 드리지 않았습니까. 나라예산을 아끼느라 우리가 F­16으로 바꾼 겁니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감사원의 율곡조사가 깊어지자 워싱턴에 있는 김 전 수석은 시원하게 『돌아가겠다』는 얘기를 않고 있다.
헤리티지 재단과 관계된 일을 하고 있다는 김 전 수석은 이병기 전 의전수석의 전화를 피하고 있고 며칠전 연희동 핵심인사와의 전화통화에서 여러차례 「결백」만을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는 미국 일정을 이유로 귀국이 어렵다는 입장을 밝혔다. 노 전 대통령이나 연희동 측근들은 그가 즉각 귀국하리라 기대했다기 보다 「떳떳함」을 강조하기 위해 귀국을 종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노 전 대통령은 6공정권의 비리의혹에 대해 『나는 떳떳하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한다. 율곡사업만 하더라도 전투기·잠수함 등 굵직굵직한 것만 직접 결재했고 그것마저도 군의 다수의견을 따랐다는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은 감사원이 율곡특감에 착수할 무렵 측근들에게 『자네들 몰래 내가 정치자금이나 커미션을 받은 것은 절대 없으니 안심하라』고 했다고 한다.
노 전 대통령은 또 소영씨부부의 「20만달러 사건」도 빠르면 이달내로 딸부부가 귀국해 검찰조사를 받으면 의혹이 걷힐 것으로 믿고 있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의 연희동 생활은 하루하루가 답답하다. 보통사람으로 돌아가 시정에 자연스럽게 어울리겠다는 꿈은 진작 깨졌고 그의 일상사는 불안과 초조로 바뀌고 있다.
5·18 전후로 대학생들이 「체포」 하겠다며 동네어귀까지 몰려온 이래 바깥 외출을 거의않고 있다. 골프 대신 했던 테니스마카저 최근엔 못하고 있다. 이번주쯤 다시 북한산 등산을 시작해볼 생각이다. 백담사가 따로 없는 형국이다. 연희동이 곧 감옥이나 백담사나 마찬가지다.
수석비서관을 지냈던 인사들 말고는 방문객도 뜸하다. 기껏 가족들과 식사를 같이하거나 재미교포의 격려편지를 읽고 외국기자와 남북문제를 얘기하는 정도가 낙이라면 낙이다.
노 대통령은 최근 『모든게 내 부덕의 소치』라든가 『이제 남은 것은 역사의 평가뿐』이라는 현실체념 또는 도피적인 심정을 자주 털어놓는다고 한다.
그는 성격적으로 별로 「놀라는」 편이 아니다. 그러나 최근엔 밤잠을 설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지척에 있는 전두환 전 대통령은 아예 상대도 해주지 않고,과거 군후배들도 전씨만 찾아가는 현상이 뚜렷하다고 한다.
노 전 대통령은 이같은 고통을 피해 서울생활을 버리고 대구로 낙향하는 계획을 앞당기려고 마음먹고 있다. 그래서 사람을 시켜 비서·경호팀도 묵을 수 있는 단독주택 3∼4채를 알아보고 있으나 여의치 않다고 한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자신과 친인척의 비리로 퇴임후 백담사 유배를 겪어야 했다.
노 전 대통령은 자신은 결코 백담사행같이 「서러운 일」이 없을 것으로 믿어왔다.
그러나 6공비리가 터지면서 그의 연희동집에는 서럽고 아픈 가시울타리가 쳐지고 있다.<김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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