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써야 할 현대사/안병영(시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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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최근 한국논단과 한국갤럽조사연구소가 함께 실시한 「6·25 관련 대학생의 의식조사」 결과는 충격적이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이승만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북한의 김일성에 대한 평가보다 훨씬 부정적이라는 사실이다. 이승만은 대학생의 의식속에서 최악의 평점을 받고 있는데 반해,김일성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유보적이거나 얼마간 긍정적 여운을 남긴다. 한마디로 김일성의 신화는 아직 남아 있는데 이승만의 전설은 완전히 실종된 상태다.
○세대간 역사인식 큰차
우리 현대사의 모진 풍파속에서 여러 모습으로 드러난 정치가들을 한마디로 평가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다. 그러나 대학생들의 이러한 평가는 지난 역사를 직접 체험한,앞선 세대의 눈으로 보면 매우 편향적이다. 윗세대의 많은 이들은 아직도 김일성을 동족상잔의 주범으로,또 한뼘의 자유도 없는 지구촌의 변방지대인 오늘의 북한을 만든 장본인으로 생각하고 혐오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역시 많은 이들은 이승만에 대해 그의 실정과 독재를 세차게 비판하면서도 냉전상황에 대한 그의 투절한 현실인식과 반공투쟁이 없었던들 해방공간에서 한국전쟁을 거치는 동안 한반도의 공산화는 예정된 과정이 아니었겠느냐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따라서 윗세대들은 오늘의 대한민국 체제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서라도 이승만시대를 끝없이 평가절하할 수 없다는 인식을 얼마간 공유하고 있다. 이렇게 볼때 한국 현대사에 대한 세대간의 역사인식 차이는 매우 심각하다. 이러한 차이의 밑바탕에는 세대간의 삶의 체험 및 이념적 정향의 차이,그리고 유행적 사유의 영향이 서로 얽혀 있으리라고 본다. 특히 젊은이들의 역사인식 속에는 아직 자리잡지 못한 의식의 방황을 쉽게 감지할 수 있다.
한국현대사에 대한 시각이 이처럼 세대간 차이가 커진데는 지난 시대의 책임이 크다. 오랫동안 우리사회는 반공이데올로기를 앞세온 냉전적 역사인식이 일방적으로 지배했다. 따라서 「적과 동지」및 「흑과 백」의 이분법적 논리에 따라 역사가 일방적으로 해석되었고,이 틀에서 조금만 어긋나도 사상을 의심받곤 했다. 해방 이후의 역사는 반공주의 승리사로 기술되었고,그런 과정에서 우리 현대사의 많은 부분이 빛을 보지 못했고 더러는 관제적으로 각색되었다.
○편향된 좌우이념 교차
그러다가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 사태는 반전된다. 서서히 민주화의 열풍이 불어오면서 급진적 좌파이데올로기가 범람하기 시작했고,그 소용돌이 속에서 지난 역사는 완전히 정반대의 냉전적 시각에서 다시 쓰이기 시작했다. 반공의 영웅상들이 이제 민족과 계급의 반역자로 단죄되고,특히 이승만은 「친미사대주의자」로,또「영구분단의 원흉」으로 매도되었다. 관제적 반공이데올로기 교육에 식상한 젊은이들에게 혁명적 체제변혁을 표방하는 사회주의적 세계관은 한때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갔다. 오늘 우리 젊은이들의 의식속에 각인된 한국 현대사에 대한 좌파적 시각은 그때 집단적으로 유행처럼 수용된 것이다.
교조적 이데올로기는 언제나 역사를 자의적으로 해석한다. 반공이데올로기가 휩쓸고 지나간 역사의 들녘을 다시 친공 이데올로기가 또 한번 거칠게 휩쓸고 지나갔다. 그들이 역사의 진실을 외면하고 역사속에 가공의 집을 짓는다. 그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의 참 역사는 산실되고 많은 이가 거짓 역사의 포로가 된다. 그 과정 속에서 우리의 자유로운 사유는 병들고 의식의 박제화된다. 지난달 우리의 언로가 조금만 더 열렸더라면,그리고 그때 그 시대를 보는 다양한 시각과 사료가 좀더 자유롭게,또 널리 펼쳐졌어도 아마 우리 젊은이들은 오늘보다 훨씬 균형되고 사려깊은 역사 의식을 내면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역사는 언제나 새 역사의 산실인 것이다.
서구 여러나라의 경우를 보면 현대사에 대한 학문적 연구열이 대단히 높다. 그에 못지 않게 현대사의 주요쟁점에 대한 대중적 관심과 참여도 놀랄만큼 활발하다. 따라서 줄기찬 현대사 연구와 더불어 새로운 사료의 발굴과 해석,그에 대한 논박이 끊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편향된 이념적 시각이 공론을 압도한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시민이 바른 역사를 함께 기술하는데 동참한다.
○객관적인 재조명 필요
최근 우리 사회에는 30여년간의 군사정권에 대한 평가를 비롯해 지난역사를 재조명하려는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다. 이제 보다 책임있고 객관적인 현대사를 다시 써야 할 시기다. 아울러 지난 역사의 빛과 그림자가 여러 측면에서 다양하게 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문민시대의 자유롭고 개방적인 언론문화 속에서 정권의 이해관계와 교조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편향되지 않은 참 현대사를 온 국민이 손모아 함께 쓰게 되기를 기대한다. 그때쯤이면 아마 우리 젊은이들의 의식의 방황도 끝낼 수 있을 것이다.<연세대교수·행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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