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측 편지 문구 놓고 과민반응/오영환 통일부기자(취재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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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특사는 부여된 임무의 중요성을 고려하여 각기 통일사업을 전담하여 보는 부총리급으로 하며…』
지난달 25일 우리측에 전달된 북한 강성산총리의 서한 말미의 한 토막 때문에 요즘 정부 통일관계 부처들 내부에서는 미요한 기류가 흐르고 있다. 부총리라고는 단 두명밖에 없는 한국에서 「통일사업을 전담하는 부총리급」이라면 누가 봐도 북한측의 특사로 한완상 부총리겸 통일원장관을 점찍었음을 단박에 알수 이다.
북한의 서한이 온 바로 그날 한 부총리는 통일문제에 관한 의견수렴차 김병삼군 등 한총련 간부들과 첫 공식 대좌하고 있었다. 김군 등은 며칠뒤 북한 대학생들과 전화접촉을 시도,사전 구속영장이 떨어졌다.
이 때문인지 문민정부 수립후 아무소리 않고 눈치만 보던 정부안의 보수적인 일파들은 얼씨구나 싶은듯 일시에 볼멘소리들을 쏟아냈다.
대북문제에서 한 부총리가 독주하면서 너무 서두른 것이 이런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그의 진보성향이 주로 비판대상이었고 심지어 48년 남북연석회의에 참석,결과적으로 북한정권에 면죄부를 씌워준 김구선생의 전철을 밟을거라는 논리까지도 등장했다.
핵문제 해결방안을 둘러싸고 삐걱거리던 불만을 일시에 털어놓고 있다.
그 바람에 북한측에 일방적으로 「점찍힌」 한 부총리 자신도 잔뜩 움츠러들었다.
그는 1일 황인성 총리주재로 열린 통일관계 고위전략회의에서도 아예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니 못했을 것이다.
북한의 편지가 처음 왔을 때 「핵문제를 비켜가면서 시간을 벌고,우리의 통일정책팀 사이에 이간을 붙이겠다는 의도」라는게 당국의 최초 반응이었다. 그것이 북한측의 의도라면 꼭 그대로 되어가는 꼴이다.
통일관계자들이 무릎을 맞대고 밤새 묘안을 짜내도 시원찮을 판에 주무장관의 진보성향을 미끼 삼은 북한의 편지 하나에 놀아나는 판이다.
기술 북한이 제기한 「부총리급 특사」라는 자격은 얼마든지 회담의 진행과정에서 조정될 수 있는 「사소한」 문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를 트집잡아 진보적인 정책에 제동을 걸겠다는 것,이것이 우리 대북정책 관계자들의 실체인지도 모른다. 그들이 대북 관계전문가라는 이유로,기밀의 보호속에서 안주하던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 이 부문에 대한 「개혁」이야말로 시급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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