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의 비극 파격적 해체|에밀리오 파체코저 『멀리 있는 죽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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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우리에게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멕시코 작가 호세 에밀리오 파체코의『멀리 있는 죽음』은 우선 그 형식의 독특성으로 독자를 혼란시킨다. 어디까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상상인지를 전혀 구분하기 어려운 이 소설은 당연히 줄거리를 요약한다거나 인과관계를 따지는 짓을 쓸모없게 만든다. 말하자면 이 작품은 흔히 얘기하는 해체소설의 범주에 드는 작품이다. 그러나 그 상상의 출발점이 대개의 해체소설이 보여주는 사소설적인 자의식 과잉에 근거하지 않는다는 점이 이 얄팍한 소설의 색다름이다. 1967년에 처음 발표되고 1979년에 전면 수정된, 그래서 아마도 파체코의 대표작으로 짐작되는 이 소설은 불확실한 이유로 멕시코의 어느 도시에 숨어사는 M이라는 사람이 자신의 은신처 건너편 공원 벤치에 있는 한 사나이의 정체에 대해 나름대로 상상을 시작하는 것으로 막을 연다. 이어서 작품은 로마병에 의한 유대인 학살, 나치에 의한 폴란드에서의 유대인 학살들이 역사적 진술과 상상이 뒤섞인 특이한 형식에 의해 그려진다. 이야기의 전개가 중반을 넘기면서 소설은 M이 나치의 충복으로서 유대인 학살의 책임자임을 보여준다. 결말에서는 이제까지 서술된 모든 것들이 한갖 몽상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암시로 끝난다.
이 소설은 솔직히 말하면 솜씨가 신통치 않은 장인이 대충 만든「언어의 미로」같아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는 두개의 강력한 드라마의 상호충돌이 빚어내는 감동적인 울림이 있다. 한 민족의 압박으로 얼룩진「역사의 드라마」가 한 축이라면 한 인간의 의사소통의 불가능성을 넘어서기 위한「기호의 드라마」가 그 또 다른 축이 된다. 이 둘을 결합시키기 위해 저자는 다양한 글쓰기의 양식을 시험한다. 산문적인 논리를 거부하는 돌발적 이미지의 연쇄, 허구적인 역사기록의 거듭된 삽입, 전위시적인 문단배열 등 이 소설의 방법적 다면성은 현실의 복합성에 정확히 대응한다. 소설적 파격이 사실은 작가의 현실대응능력의 파산이 아니냐는 일부의 시각에 이 멕시코소설은 좋은 반론의 근거가 된다. <도서출판 녹진·1백89쪽·3 천5백원><임재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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