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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장(斷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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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난중일기』에 나오는 이순신 장군의 독백이다. ‘애’는 창자를 뜻하는 순 우리말이다. 끊는다라는 말이 붙었으니 한자어로 표현하자면 ‘단장(斷腸)’인 셈이다.

 6·25전쟁의 비애를 가장 잘 떠올리게 하는 가요는 ‘단장의 미아리 고개’다. “울고 넘던 그 고개여, 한 많은 미아리 고개”라는 노랫말에서 전쟁으로 남편을 잃은 여인네의 슬픔이 흠뻑 묻어난다.

 슬픔이 극에 달하면 속이 녹아 드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보통 가족과 친지를 잃었을 때 받는 크나큰 슬픔을 이야기하지만, 이순신 장군의 예에서 보듯이 긴장과 스트레스가 최고에 이른 상황의 수고로움을 표현할 때도 쓰인다.

 단장이란 단어를 가장 많이 활용하는 곳은 중국이다. 이 한자 단어를 중국 포털 사이트의 검색란에 넣고 두드리면 중국의 시사(詩詞)에서 등장했던 관련 콘텐트들이 무수히 뜬다. 감당키 어려운 슬픔은 대부분 단장이란 말로 표현돼 있다.

 송대의 문호 소동파(蘇東坡)의 경우는 ‘꿈에 본 아내’라는 사(詞)에서 “생각하면, 해마다 애가 끊였을 것이다/ 밝은 달밤/ 다복솔 언덕에서(料得年年斷腸處, 明月夜, 短松崗)” (『중국시가선』·지영재 편역)라고 읊었다. 10년 전 세상을 떠난 아내를 꿈속에서 본 뒤 뇌리에 잔영으로 남아 있는 달빛 밝은 밤의 다복솔 언덕, 즉 아내의 무덤을 떠올렸다.

 슬픔의 극한은 자식을 잃은 부모의 것이다. 지금은 거대한 댐으로 물길이 약해졌지만 중국 삼협(三峽)이란 곳은 원숭이가 유독 많았다. 한 장군이 삼협을 지날 때 그의 부하가 원숭이 새끼 한 마리를 잡았다. 그 어미는 협곡을 따라 배를 쫓아다니면서 슬피 울었다. 급기야 어미는 배에 뛰어들다 부딪혀 죽고 말았다. 배를 갈라 보니 창자가 모두 끊어져 있었다고 한다. 『세설신어(世說新語)』에 나오는 고사의 내용이다. 모성을 감동 깊게 보여 준 어미 원숭이 때문인지 역대의 중국 시인묵객들은 그 울음소리를 듣고 슬픔을 떠올린다. 원숭이 울음을 뜻하는 ‘원소(猿嘯)’라는 단어는 옛 문인들의 글에 자주 등장한다.

 탈레반에 잡힌 한국인 인질들의 부모가 그 심정일 것이다. 저들의 총에 스러지는 자식을 보는 부모의 마음이 애를 끊는 듯한 그 슬픔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요즘 많은 사람이 아침이면 TV 앞에 모여 앉는다고 한다. 그 슬픔을 나눠 보려는 생각에서다. 단장의 아픔에 한국인들의 마음이 붉게 젖는다.

유광종 국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