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오만과 오판이 결의안 채택 자초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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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정부와 의회의 오만과 오판이 화를 불렀다. 역사의 과오를 인정하지 않는 그들의 태도는 미 하원에 위안부 결의안이 왜 필요한지 공감대를 확산시키는 촉매역할을 했다.”

7개월 동안 위안부 결의안이 발의되고, 처리되는 과정을 지켜본 미 의회 관계자의 얘기다. 그의 지적대로 일본 정부와 의회는 위안부 결의안을 다루면서 외교적 결례 등 여러가지 문제를 노출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를 비롯한 일본의 고위 관계자와 일본 의원들이 밝힌 위안부에 대한 입장은 그들의 인식이 심각하게 삐뚤어져 있음을 광고한 셈이 됐다.

미 행정부와 의회는 그들의 주장을 역겨워했다. 톰 랜토스 하원 외교위원장이 지난달 30일 하원 전체회의에서 “역사를 왜곡ㆍ부인하고 희생자들을 탓하며 장난하는 일본 내 일부 인사들의 기도는 구역질나는(nauseating) 일”이라고 비난했을 정도다. 일본은 워싱턴의 대형 로비ㆍ홍보회사를 3개나 동원했지만 왜곡된 역사관에 바탕한 그들의 로비는 통하지 않았다.

아베 총리는 3월 1일 일본 제국이 위안부를 강제동원한 사실을 부인하며 “책임이 없다”고 말했다. 다음날 일본을 방문 중이던 존 네그로폰테 미 국무부 부장관은 “위안부 문제는 개탄스러운 일”이라며 아베 총리를 겨냥한 듯한 발언을 했다. 같은 달 16일 토머스 시퍼 주일 미국대사는 “일본군이 강제 동원한 위안부가 존재했고, 그들이 매춘을 강요당한 건 명백하다”고 했다. 지난해 위안부 결의안이 추진됐을 때 “일본을 자극할 만한 표현은 다듬는 게 좋다”는 의견을 전달한 국무부 고위 관계자들이 이런 말을 한 것은 일본의 왜곡된 역사인식을 방치할 경우 아시아의 평화가 흔들릴 수 있다고 우려한 때문이라고 한다.

아베 총리는 자신의 발언에 대한 비난여론이 미국에서도 확산하자 4월 26일 워싱턴에서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 등 하원 지도부를 만났다. 그때 아베 총리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 “사과의 느낌(sense of apology)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런 그에 대해 하원 지도부는 “진심으로 사과할 마음이 없는 것 아니냐. 그의 인식은 과거 일본 정부에도 못미친다”는 평가를 내렸다고 한다.

다음날 아베 총리는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과 만나 “위안부 문제는 죄송하다”고 했고, 부시 대통령은 “사과를 받아들인다”고 했다. 그러나 아베 총리는 일본으로 돌아간 뒤 “미국에 사과한 적이 없다”고 말해 미국에선 “진실성이 결여된 사람”이라는 지적을 받았다.

6월 14일 일본 의원 40여명은 워싱턴 포스트에 “위안부 동원에 강압이 없었고, 위안부들은 대접을 잘 받았다. 미국도 일본 점령 당시 위안소 설치를 요청하지 않았느냐”는 광고를 냈다. 이는 미 의회와 행정부, 언론의 분노를 촉발했다. 주미 일본 대사관은 급히 “광고 내용이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과는 다르다”고 해명했지만 엎지러진 물이었다. 혼다 의원은 30일 "광고가 역효과를 냈다"고 말했다.

일본 대사관도 문제를 일으켰다. 가토 료조 주미 일본 대사는 6월 22일 펠로시 의장 등 하원 지도부 5명에게 “결의안을 가결하면 일본은 이라크전 협조를 재고할 것”이라는 협박성 편지를 보냈다. 외교적으로 세련되지 못한 표현이 든 서한을 받은 펠로시 의장 등은 상당히 불쾌해 했다는 게 하원 관계자들의 얘기다. 하원 외교위가 같은 달 26일 결의안을 통과시켰고, 그 직후 펠로시 의장이 “결의안을 지지한다”는 공식입장을 발표한 건 그런 불쾌함도 작용했다고 하원 소식통은 전했다.

워싱턴=이상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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