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정책조정실장 비경제분야 강삼재(의원탐구:36)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개혁 뒷받침 실무주역/계파의식 초월 의정전념/“야당의원 경험 정책입안에 도움 크죠”
□강 의원 약력
▲경남 함안출신(41) ▲경희대총학생회장 ▲경남신문기자 ▲신한민주당 부대변인 ▲통일민주당 대변인 ▲민자당 정세분석위원장 ▲제2정책조정실장 ▲12,13,14대 의원
김영삼대통령 취임후 단행된 민자당 당직개편에서 최형우 전사무총장과 함께 가장 적재적소에 기용됐다고 평가받았던 인물이 있다. 그는 다름아닌 제2(비경제분야) 정책조정실장에 임명된 3선의 강삼재의원(41)이다.
이 자리는 문민정권이 추진해나갈 각종 개혁정책을 뒷받침해야하는 직책이다. 따라서 대통령의 개혁의지를 잘 이해하는 사람이 이 자리에 앉을 필요가 있었다. 그런 면에서 강 의원이야말로 적임자라는 중평이었다.
그는 현재 이같은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우선 과거 권위주의시절 형식에 그친 정부·여당간의 당정회의를 생산적 회의로 탈바꿈시키는데 노력하고 있다.
지난달 20일 통일원과의 당정회의때 있었던 일이다. 그는 회의 벽두부터 통일원측에 대해 따끔한 질책을 가했다.
『주요업무현황 보고가 너무 부실하다. 제목만 나열해 놓았지 아무 내용이 없다. 특히 국민적 관심사인 남북회담 재개와 관련,그 구체적 계획과 소요예산 등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다. 남북교류협력 현황도 빠져 있다. 또 매년 43억원이나 쓰는 민족통일연구원과 같은 주요 산하기관에 대한 보고도 누락되어 있다. 이래가지고 어떻게 정책을 심도있게 논의하겠느냐.』
그전처럼 빈약한 자료를 내놓고 회의를 대충 때우려던 통일원으로서는 뜻밖의 봉변을 당한 셈이었다.
코가 뾰족한 강 실장은 인상대로 날카로운 편이다. 그는 그 기질과 스타일을 대학생때부터 단련해왔다. 경희대 신문방송학과 2학년때인 73년 운동권에 몸담아 비판 논리를 다듬었고,75년 이 학교 총학생회장을 지냈다. 그는 총학생회장 시절 유신타도를 외치다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돼 제적당했다.
영어생활 달포만에 풀려난 그는 마산으로 낙향해 공사장 막노동판,다방 주방 등을 전전하다 76년 그곳의 경남신문사에 입사,기자가 됐다.
사회부 기자로서 한참 재미가 붙을 즈음 80년 서울의 봄을 맞았다. 대학에도 복학의 문이 활짝 열렸다. 그는 우선 중단했던 학업을 마치겠다고 마음먹고 상경했다. 그러나 5·17이 일어났고 전력이 문제돼 지명수배받게됐다. 그는 한달쯤 피신해 있다가 자수했다. 그런데 수사당국은 문제인물은 대략 처리했다고 생각했음인지 각서만 받고 의외로 순순히 풀어주었다. 그래서 그는 10년만에 대학을 졸업할 수 있게 됐으며 내친김에 대학원에까지 진학했다. 그러나 만학의 길도 순탄치 않았다. 엉뚱하게 총선에 나갔다가 수업일수 부족으로 제적당했기 때문이다.
81년 3월의 11대 총선을 앞두고 현실 참여파 운동권은 군사정권의 폭압을 널리 알리기 위해 총선참여를 결정했다. 이편 운동권은 야성이 강한 마산에 당시 28세에 불과하던 강 실장을 내보내기로 했다.
주변의 강권에 못이긴 그는 마지못해 선거 20일을 앞두고 출마를 결심했다. 그는 맨손으로 뛰었다. 홍보물 한장 찍어 돌리지 못했다. 낙선은 당연했다. 그러나 그는 3만여표나 얻어 주위를 놀라게 했으며 이 때의 득표가 그를 정치인으로 성장하도록 하는 밑거름이 됐다.
85년 2·12총선을 앞두고 신한민주당이 창당됐다. 신한민주당은 이때 참신한 운동권 인사들을 찾았다. 그는 당시 미국에 있던 김대중씨를 대신해 동교동계를 관리하고 있던 김상현 민추협공동의장대리(민주당의원)에게 발탁됐다. 김 의원은 그의 11대 득표수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강 실장에게 당차원에서 선거자금이 지원될 터이니 11대처럼 어려운 싸움은 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격려했다.
그러나 공천은 의외로 쉽지 않았다. 김영삼 민추협공동의장이 당시 현역의원이던 백찬기씨를 마음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공천심사 맨마지막날 백씨와 함께 이민우총재를 만났다. 『둘 다 당선될테니 복수공천을 해달라』고 졸라 승낙을 얻어냈다. 그리고 장담한 대로 5만4천여표를 얻어 1위 당선됐다(백씨는 낙선). 더욱 33세의 최연소의원으로 당선됐다.
그는 그러나 당선되자마자 그 기쁨을 누릴새도 없이 오랜 계보적 전통을 가진 야당생리 때문에 고통을 당해야 했다. 제도권에 들어온 그는 이제 동교동이냐,상도동이냐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에게 공천을 준 동교동측에는 인간적으로 미안했지만 지역정서를 따라갈 수 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대신 그는 계파 의식을 가능한한 초월해 의정활동에만 전념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그는 5공시절 특유의 날카로움을 발휘,이철·박석무의원(민주당) 등과 함께 문공위 삼총사로 불릴 정도의 의정활동상을 보여주었다. 그는 야당의원으로서의 그때 경험이 집권당 정책을 입안하는데 매우 소중한 자산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이상일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