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기업규제 완화법안」/곳곳서 반발… 훼손되는 근본취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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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부처간 이견 크고 이해집단 로비도 치열/영양사 등 의무고용 관련규정 수정 불가피
정부와 민자당이 지난 21일 오후 민자당사에서 기업활동규제 완화 특별조치 법안에 대해 논의하는 동안 대한영양사회 회원 2명은 줄곧 회의장 주변에서 초조한듯 서성거렸다. 이들은 이미 회의 직전 당정책실에 법안의 영양사 의무고용 완화에 대한 부당성을 내세우는 건의서를 냈다. 그러면서도 안심하지 못한듯 회의장에 드나드는 정책관계자들을 붙잡고 애소를 거듭했다.
영양사회는 『지난해 12월 「1백인 이상 집단급식소가 설치된 제조업은 영양사를 두어야 한다」는 내용의 식품위생법 시행령이 공포됐는데 불과 몇개월만에 이를 뒤집으려는 논의는 행정의 일관성을 의심케 하는 것』이라고 반발했다.
또 『영양사 의무고용 완화는 근로자 건강·복지에 대한 중대한 위협으로 노사마찰과 노동의 질적하락을 유발,결국 영양사 인건비 절감액보다 기업의 손실액이 더 클 것』이라고 주장했다.
기업활동 규제완화 특별법 제정은 『앞으로 개정될 공직자윤리법에 버금가는 혁명적인 파급효과를 가져올 것』(서상목 제1정책조정실장)이라는 표현의 적합성을 떠나 현재 어렵기 짝이 없는 기업경영과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당정이 이 법 제정을 서두르는 것은 기업활동과 관련된 행정규제만 해도 1백여개 법률에 산재해 있어 이를 일일이 개정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걸리는데다,관계부처의 이기주의에 시달리다 보면 경제회생은 물건너 갈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특히 김영삼대통령이 『경제회생은 부정부패 척결과 행정규제 완화를 통해 이뤄지는만큼 특별법을 오는 임시국회에서 반드시 제정하라』고 지시한 것도 이런 사정 때문이다.
그러나 특별법안 마련을 둘러싸고 벌써부터 관계부처의 이기주의가 판을 치고 있고 이해집단의 로비가 치열해 졸속제정이 우려된다.
우선 그동안 이 법안을 성안해온 상공자원부가 각 부처 및 이익단체의 로비에 시달리다 못한 끝에 21일 당정회의를 기화로 법안에서 손을 떼고 당에 맡겨버렸다.
이 법안과 관련,현재 이해관계가 가장 첨예하게 엇갈리고 있는 대목은 법정의무고용 완화문제다.
먼저 영양사·조리사의 경우 보사부가 식품위생법 시행령이 공포된지 얼마되지 않았고,근로자 후생복지 저하와 5만6천여명에 달하는 영양사·조리사의 실직이 우려된다며 현행 제도의 유지를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때문에 당은 당초 전제조업체에 한해 영양사·조리사 고용의무를 면제해 주려고 했다가 2백인 미만 제조업체에만 이들의 고용의무를 면제해주기로 했다.
식품제조업체 식품위생관리인의 경우 상공부와 당은 업체가 근로자에게 소정의 교육만 받도록 하면 위생관리인을 고용한 것으로 간주할 생각이었으나 역시 보사부가 반발해 현행 제도를 유지하기로 했다.
환경관리인에 대해서 당은 제조업체가 수질·대기분야중 1인을 환경기사로 고용한 경우 나머지 분야의 환경관리인(3∼5종)을 고용한 것으로 보려고 했으나 환경처는 배출시설 3종 관리인 고용완화는 안된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고있다. 환경처는 또 공업단지·협동화단지 등에서 동종업종이 집단화된 경우 공동의 환경관리인 선임을 허용하는 것도 반대했으나 당은 이를 묵살했다.
당은 외국간행물을 수입할때 현재 대외무역법상 무역업 허가 외에 외국 간행물 수입·배포에 관한 법률에 따른 수입업 허가를 따로 받아야 하는 것을 무역업 허가만 받아도 되는 것으로 일원화했다. 그러나 문화체육부는 이렇게 하면 이념서적의 대량수입을 막을 수 없다며 수입업 허가제 폐지 대신 등록제로 바꿔달라고 졸라 24일 당정회의에서 이를 결국 관철했다. 중소제조업체 안전관리자 고용의무 완화와 관련,당은 두가지 안을 검토중이나 각각 내무·상공자원부와 노동부가 이견을 내놓고 있다. 즉 산업안전보건법상의 산업안전관리자를 고용한 경우 각종 가스사업법·소방법·도로교통법·유해화학물질관리법 등에 의한 관리자를 뽑은 것으로 간주하는 1안에 대해 내무·상공자원부가 현실성이 없다고 반대하고 있다. 노동부는 이같은 법령에 의한 안전관리자중 기업이 가장 필요한 사람을 고용,다른 법의 안전관리업무를 교육받도록 하면 나머지 관리자는 고용한 것으로 본다는 2안에 수긍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각 부처가 이처럼 의무고용 완화에 민감한 것은 바로 자신의 권한행사 폭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이들 부처는 이제까지 잘 관리해온 대상자들이 졸지에 줄어들 경우 자칫 산하기관 몇개가 밥 벌어먹을 일이 없어질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관련 이익집단과 공조해 영역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있다.
기업이 변화하는 국내외 환경에 맞춰 경쟁력을 기르려면 행정규제 완화는 시급하고 불가피하다. 구서독이나 일본이 전환기에 경제도약을 한 것도 요시다나 에르하르트 등 정치지도자들의 과감한 규제완화 조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특별법 제정도 여론의 호응을 얻고 있다는 평가다. 그러나 법안내용이 지나치게 기업주 입장만 반영하고 있어 노사간 형평이 맞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다. 여기에다 부처간 이기주의,이해집단의 로비까지 먹혀들 경우 법안의 본새는 크게 일그러질 것이라는 지적이다.<이상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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