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죄부(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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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종교에서 「죄」를 말할때는 법률적인 용어나 일상적인 용어로서의 죄와는 큰 차이가 있다. 일반적으로 종교에 있어서의 죄는 신에 대한 인간의 도발을 의미한다. 불교에서는 교법을 어긴 무자비한 행위,곧 죄업을 뜻하고,기독교에서는 하느님의 계명을 거역하고 그의 명령을 감수하지 않는 인간의 행위를 뜻한다.
그러나 죄는 종교나 신의 율법으로 금지된 어떤 행위를 하는데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살인이나 도둑질 같은 것은 물론 법률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범죄이며 동시에 죄이지만,전통적인 기독교 사상에 따르면 절망과 만성적인 권태감 같은 것도 죄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범죄와 죄를 서로 연관시키는 까닭은 종교와 법률이 똑같이 도덕상의 가르침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도덕적 과오는 종교적 믿음과 죄의식을 떠나서도 있을 수 있으므로 법률적 의미에서의 범죄는 짓지 않고 사는 사람이 있을 수 있지만 종교적 의미에서의 죄를 짓지 않고 사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있을 수 없다는 차이가 있다.
문제는 법률적 의미의 범죄거나 종교적 의미의 죄거나간에 그것을 얼마나 인정하고 죄값을 치르려는 태도를 보이는가에 달려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참회하는 모습을 보일 것이고,또 어떤 사람은 끝까지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고집을 부릴 것이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보다 더욱 나쁜 사람은 어떤 죄를 저질렀는지간에 자신은 면죄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죄값을 치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본래 면죄부는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황이 발생한 증서로서 죄를 지은 사람이 금전·재물을 바치는 경우 일시적으로 그 죄를 면하게 해주는 제도였다. 이 제도는 교회의 상업화현상을 초래하여 루터 등에 의한 종교개혁의 발단이 되기도 했으나 그 이후에는 죄를 짓고 벌을 받지 않아도 되는 여러가지 경우에 보편적으로 쓰여져왔다. 어느 시대,어느 사회에서나 당사자의 위치 혹은 기득권 따위가 면죄부를 만들어주는 재료로 통용된 것이다. 「면죄부 받은 공직자는 없다」는 정부측의 공언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국민들이 얼마나 될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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