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특집드라마 『신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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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해병대에서 군생활을 보내고 당구장일을 하던 한 청년이 있었다. 중학교밖에 졸업하지 못했지만 열심히 세상을 살아보려던 착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어느날 자신의 약혼식장에서 영문도 모르고 체포된다. 경찰에 가서야 그는 자신이 어린이 유괴살인범의 누명을 썼음을 알고 깜짝 놀란다. 수사가 진행되는 동안 그는 줄곧 자신의 결백을 주장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자신이 곧 석방될 것이라고 낙관한다.
그러나 그의 운명을 바꿔놓은 예기치 않은 일들이 벌어진다. 어느 발빠른 기자가 그가 체포돼 수사받는 상황을 특종보도하면서 그의 살인혐의는 기정사실처럼 된다. 실적에 눈이 먼 담당검사는 수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그가 범인이 아님을 알고도 상황을 뒤집는게 두려워 그대로 그를 유괴살인죄로 기소한다.
이후 그는 1년6개월간을 감옥과 법정을 오가며 보내다 결국은 무죄판결을 받고 풀려난다. 다시 바깥세계의 땅을 밟았을때 그는 새로 태어난 듯 기뻤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는 것은 싸늘한 의심의 눈초리들뿐이었다.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아무도 그의 결백을 믿으려 들지 않았다. 약혼자조차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럴 수가 있는가』하며 그는 절망에 빠진다. 소외감은 야금야금 그의 육신을 파먹었다. 결국 그는 고문과 감옥생활에서 얻은 병이 깊어져 어느날 어머니에게 자신이 아끼던 라이터를 형에게 주라는 말을 남기 고 숨을 거둔다.
9일밤 방송된 MBC-TV 기획특집드라마 『신화』는 67년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김근하군 유괴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체포됐다 풀려난 김기철씨의 실화를 다뤘다.
그동안 우리 드라마는 너무 사랑이야기에 몰두해왔다. 순정이든 불륜이든, 60년대든 90년대든 대부분의 드라마는 남녀간의 사랑을 중심으로 스토리가 전개되고 있다. 덕분에 상당수의 시청자들은 극중 삼각관계의 진행방향에 대해 중독증세에 가까운 호기심을 보인다. 그 중에 어떤 이는 허구를 사실로 착각할 정도여서 방송국에 전화를 걸어 자신이 좋아하는 남녀를 짝지워달라고 떼를 쓰기도 한다.
방송기간 중 줄곧 최고 인기를 누려온 MBC-TV의 『아들과 딸』은 시청자들의 성화에 못이겨 후남(김희애분)과 미연(채시라분)의 남편을 원래 극본과 다른 인물로 바꿔야 했을 정도다.
이렇게 사랑을 소재로 한 멜러물이 아니면 인기를 얻기 어려운 여건에서 김기철씨 이야기와 같은 사회성 짙은 소재를 과감히 기획한 것은 우리 드라마의 영역을 넓히는 의욕적인 시도로 평가받을만 하다.
그러나 이 드라마는 강한 의욕에 비해 드라마의 완성도는 그리 높은 편이 못된다. 주연을 맡은 연극배우 출신 신인 조재현을 비롯해 연기자들의 연기는 안정돼 있으나 곳곳에서 작위적인 연출이 눈에 띄었다. 특히 촛불과 라이터를 통해 주인공의 죽음을 암시한 대목은 너무 진부하다. 또 마지막 장면에서『이 사건은 이제 신화가 돼버렸다. 과연 누가 이 남자의 죽음으로부터 떳떳할 수 있겠는가』라는 흥분된 목소리는 불필요한 비장감으로 오히려 극의 효과를 반감시키고 있다. 신화는 그 자체로서 완결미를 지니고 있을 때 신화로서의 힘을 발휘하지 않을까. <남재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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