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 대북사업 나선 김윤규 ㈜아천글로벌코퍼레이션 회장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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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호 12면

신동연 기자

인터뷰는 서울 서초동의 아천글로벌 사무실에서 두 시간 동안 진행됐으며 육재희 아천글로벌 대표가 자리를 함께했다.
-북한 농산물을 처음 육로로 들여온 19일 하남시 창우리에 있는 정주영 회장 묘소를 찾았는데?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정 회장님 묘소를 찾는다. 대북 사업의 진행상황을 보고하고 결재 받기 위해서다. 늦어도 새벽 5시50분에는 묘소에 도착한다. 회장님은 생전에 이 시간을 넘겨 출근하면 ‘젊은 놈이 왜 이렇게 잠이 많으냐’며 질책하시곤 했다.”

"평양 중심가에 아파트 짓기로 北과 합의"

-농산물 유통 사업에 뛰어든 배경은?

“그동안 북한 제품은 중국을 거쳐 뱃길을 통해 인천에 들어왔다. 중국산이 섞여 북한산으로 둔갑하고 제품의 상태도 좋지 않았다. 물류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직거래가 트임으로써 제3국을 통해 북한과 거래하던 중소업체들의 어려움이 사라지게 됐다. 북한도 제값 받고 농수산품을 팔 수 있다. 남북 양측에 이득이 되는 사업이다.”

2000년 6월 29일 고(故) 정주영 명예회장이 여덟번째이자 마지막 방북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면담한 후 기념촬영을 했다. 아래 왼쪽부터 시계 반대방향으로 김용순 아태위원장, 정주영 명예회장, 김정일 국방위원장, 정몽헌 회장, 김충식 현대상선 사장,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 김윤규 현대건설 사장, 이은봉 차장(명예회장 전속 사진 담당). [중앙포토]

-북한과의 협상에 어려움은 없었나?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여러 차례 편지를 보내 육로 교역의 필요성을 설명했다.

‘길도 뚫렸는데 왜 다른 나라를 통해 교역을 하느냐. 민족 간에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육로 교역에 대한 전망은?

“개성과 강원도 고성에 농수산물 집하장과 유통센터가 각각 개설된다. 지금은 농수산물과 한약재가 들어오지만 머지않아 중앙아시아·러시아의 지하자원이 북한을 거쳐 곧바로 들어올 것이다.”

-중동지역에 인력을 송출하기로 북측과 협의했는데?

“두바이 등 중동 건설현장에 북한 노동력을 최대 2만 명 송출하기로 북측과 합의했다. 돈이 있는 곳에 가야 돈을 벌 수 있다고 강조했다. 1974년 오일쇼크 때 한국 노동자들이 모래바람과 맞서며 중동 건설 신화를 만들었듯이 북한이 ‘제2의 중동신화’를 만들어보라고 설득했다. 이르면 10월 중 1차로 300명을 선발해 시범적으로 파견할 예정이다.”

이르면 10월 북 인력 300명 중동 송출

-북한에 숙련된 건설 노동력이 있는가?

“건설현장의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도록 훈련시킬 계획이다. 왜 우리 돈을 들여 교육시키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결국 우리 기업이 쓸 인력이다. 개성공단 인력도 마찬가지 아닌가. 퍼주기가 아니라 투자다.”

-다른 대북사업도 합의했나?

“평양 중심가인 ‘유경 정주영 체육관’ 부근에 오피스텔과 시범아파트를 짓기로 합의했다. 시공사 선정이 끝나는 대로 통일부 승인을 얻어 착공에 들어간다. 또 북측 기업과 합작 또는 합영 방식으로 북한의 주택건설 사업에 참여하기로 뜻을 모았다. 평양에 랜드마크(상징 건물)를 건설하자는 아이디어도 내놓았다. 핵 문제가 풀리고, 북·미 관계가 개선되면 평양에 국제적 경협자금이 많이 들어올 것이고 건설이 활기를 띨 것으로 본다. 현재 중국 거부들이 평양의 건물을 무차별적으로 사들이고 호텔 등에 많이 투자하고 있다고 한다. 앞으로 중국인을 통하지 않으면 호텔 예약을 못할지도 모른다.”

김정일 위원장이 개성공단 입지 제안

-98년 금강산 개발과 함께 공단사업이 추진됐는데 어떻게 개성으로 결정됐나?

“애초 현대는 바다와 가깝고 남한과 멀지 않은 해주를 제안했다. 북측은 해군기지가 있고 북방한계선(NLL) 문제가 걸려 있어 곤란하다는 입장이었다. 이에 김 위원장이 서울과 가깝고 휴전 이전까지 남한 땅이었던 개성에 공단을 조성하는 것이 좋겠다고 전격 제안했다.”

-98년 현대가 금강산 개발을 서두른 이유는?

“일본 기업이 홍콩 업자를 통해 18억 달러를 들여 금강산 개발사업을 북측에 제안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민족의 훌륭한 자연자원을 외국인이 개발하도록 놔둘 수 없었다.”

-대북송금 특검 당시 일본인 요시다 다케시의 대북밀사설로 논란이 많았는데.

“그는 정주영 회장님이 북한과 대화채널을 트는 초기단계에서 메신저 역할을 했다. 회장님의 방북 일정 등을 북측에 전달하는 심부름꾼이었다. 그가 대북사업이나 남북 정상회담 성사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이야기는 과장된 것이다.”

-정몽헌 회장이 2003년 8월 자살한 이유는 무엇인가.

“내가 모르는 또 다른 이유가 있지 않나 싶다. (특검이나 대검 중수부의 수사로 심리적 압박을 받아 자살한 것만은 아니라는 뉘앙스) 아무튼 내가 제대로 모시지 못했다는 자책이 든다. 대북송금 특검은 결과적으로는 잘된 측면도 있지만 애초에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 뒤 남북 간에 얼마나 큰 불신이 생겼으며 남북관계가 후퇴했나?”

-김 위원장을 만났을 때 에피소드를 소개해달라.

"지금까지 다섯 차례 만났고 그중 네 차례를 면담했다. 언젠가 김 위원장이 막걸리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민족의 향기가 있고 조상의 혼이 담겨 있는 술이기 때문이라는 게 이유였다. 그래서 12가지의 막걸리를 갖고 방북한 적도 있다. 김 위원장은 그중 포천막걸리를 제일 좋아했다. 김 위원장은 다섯 시간 동안이나 화장실에 가지 않고 회의를 주재했는데 ‘민족적 사업을 이야기하는데 위생소 가는 것쯤은 참을 수 있다’고 말했다."

정몽구·몽준 회장과 교류 없어

-2005년 7월 현정은 회장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면담할 때 어떤 이야기가 오갔나?

“김 위원장은 ‘앞으로도 현대가 대북사업을 잘 해나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나에게 ‘대북사업을 주도적으로 잘 해달라. 돌아가신 정몽헌 회장 모시듯 현 회장을 잘 보필하라’고 네 번이나 반복하며 강조했다. 백두산 관광과 개성ㆍ평양 관광도 현대가 중심이 돼 적극 추진하라고 덧붙였다. 그런데 북에서 돌아온 뒤 현대그룹이 감사에 들어갔고 그 과정에서 내가 물러났다. 아쉬운 대목이다.”

-당시 현 회장과 갈등이 심했는데?

“그것이 현 회장님만의 뜻이었겠나? 나름대로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현 회장님이 하는 대북사업이 잘되기를 바란다.”

-최근 정몽구ㆍ정몽준 회장 등 현대 쪽 인사들과 접촉은 하는가?

“대북사업을 하면서 특별히 보고드린 바도 없고 지원받는 일도 없다. 내가 잘하는 것이 그분들을 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2~3개월 뒤 파주 통일동산에 농수산물 물류센터를 착공하는데 ‘정주영 기념관’을 함께 조성할 예정이다. 그때 두 회장님을 만나서 상의할 생각이다.”

김윤규 회장은

현대가(家)의 마지막 가신으로 36년간 현대그룹에서 일했다. 서울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하고 1968년 현대건설에 입사해 20년 동안 중동 건설현장을 누볐다. 입사 후 매일 새벽 4~5시에 출근하는 성실함으로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신임을 얻었다.

89년 리비아 출장 도중 타고 가던 항공기가 추락해 70명이 숨졌으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당시 입원 하루 만에 병원을 몰래 빠져나가 리비아 전력청 장관을 만나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윙크하는 버릇’은 이 사고의 후유증이었다.

현대건설 사장을 거쳐 현대아산 사장·부회장으로 재직하면서 현대그룹의 대북사업을 총괄했다.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은 2003년 8월 투신자살하면서 남긴 유서에서 “명예회장께는 (김윤규) 당신이 누구보다 진실한 자식이었다”고 언급했다. 2005년 10월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과 갈등을 빚고 현대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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