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씨, 이규동씨 집 드나들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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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두 허수석에 대한 전대통령의 신임에 틈새가 보이기 시작하자 여러 군데서 전대통령에게 두 허씨를「씹는」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원조씨도 그같은 현상 속에 등장한 한 건의자였는지 모른다. 두 허씨를 거론한 사람들은 대부분『대통령께서 두 허씨에게 너무 의존한다는 여론도 있습니다』고 했다. 전대통령의 자존심을 겨냥한 것이다. 이들은 전대통령의 장인인 이규동씨를 적극 활용했다. 친·인척 문제로 갈등을 겪었던 이학봉민정수석쪽에선 『개혁과 정의사회를 주장하면서 실명제를 반대하는 것은 모순』이라고 두 허수석의 자세를비판했다.

<김씨 자존심 건드려>누구로부터 어떤 부탁을 받았는지 모르지만 이원조사장의 역할은 확실한 듯했다. 두 허씨의 퇴진 분위기를 만들라는 임무를 맡았던 것 같고 그는 메신저로 외교안보연구원의 김상구대사를 활용했다. 그는 김대사를 꿰뚫고 있었다.
김대사는 이·장사건의 여파로 친·인척들의 공직 후퇴 방침에 따라 그해 5월 평통사무차장을 그만둔 바 있다. 그리고 호주대사로 나가기 위해 11월부터 외교안보연구원 연구위원으로 대기 중이었다. 그는 평통차장에 임명되기 전 이원조사장 밑에서 유개공 업무이사를 잠시 역임한 바 있다. 하나회가 된서리를 맞은 윤필용사건 때 그는 중령으로 예편됐다. 이씨도 그 사건에서 윤수경사령관의 자금관리를 맡았다하여 조사를 받고 한때 은행을 떠나는 불운을 겪었다. 이씨가 김대사를 활용한데 대한 Q씨의 설명.
『김씨는 81년 총선 때 고향인 상주에서 출마하려다 두 허수석의 견제로 뜻을 이루지 못했지요. 또 이·장사건때는 허씨들 때문에 평통사무차장까지 그만 뒀습니다. 김씨가 두 허씨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을 것으로 이원조씨는 계산했을 겁니다. 그럼에도 김씨는 쉽게 이씨에게 말려들지 않았습니다. 젊어서 하나회에 들었다는 죄로 군복을 벗었기 때문에 권력과 인생에 대해 여유가 있었다할까, 두 허수석의 행동에 대놓고 불만을 털어놓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고 여겨 두 허수석에게 이원조씨의 얘기를 들려주었지요』
이원조사장이 김대사에게 했다는 얘기를 들은 두 허수석은 잠시 기가 막혔다. 그러나 『전대통령에게 보고해도 괜찮다』고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을 압박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음을 눈치채고 있을 뿐이었다. 김씨는 메신저로서 이런 과정을 전대통령에게 모두 보고하고 이규동씨와도 상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표면적인 반응은「두 허수석이 잘해왔다는 정도」였다는 것이다 (Q씨).

<「정치적 청부」추측>그러나 전대통령은 얼마 후 두 허수석을 정식 해임한다. 이원조사장의 역할이 전대통렁의 결심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는 불투명하다. 분명한 것은 이사장이 없었더라도 전대통평은 두 허씨를 쫓았을 것이란 점이다.
누구보다 허씨들 자신이 그들의 운명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허화평씨의 증언. 『떠나는 문제에 있어 전대통령의 체면을 세워주는 일이 중요했다. 정권 출범이 얼마 안된 상태에서 반발하고 나오는 인상을 주어선 안된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모양 갖추기를 두려워하거나 피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퇴진문제를 두 허수석에게 직접 자기 이름을 걸고 제기한 사람은 이원조씨 외에 별로 없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여기에 5공권력 갈등사의 미스터리가 남아있다. 당시 전대통령의 불편한 심기를 아무리 안다 해도 두 허씨 문제에 나서서 개입할만한 직위에 있던 사람은 별로 없었다. 노신영안기부장은 그전 외무장관 발탁과정에서 허화평수석에게 빚이 있었고 장세동경호실장은 직책에 충실할 뿐 그런 문제에 옆 눈길을 주지 않았다. 함병춘비서실장은 아예 나설 타입이 아니었다.
때문에 이씨의 역할은「정치적 청부」로 보여진다. 그에게「밀명」을 주었거나 의논한 「배후」가 의문으로 남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씨가 전대통령과 인연을 맺은 것은 윤필용씨를 통해서였다.
대구의 명망있는 교육자 아들로 태어난 그는 부친을 따라 대구상업·대구공업·대구중학교로 옮겨다녔고 대구중학시절 선배인 윤씨를 만난다. 경북중에 편입하기 전 대구공업을 다녔던 노태우학생도 이때 알았지만 본격적으로 친해지기는 60년대 중반 윤장군의 모임에 끼면서부터다. 전대통령과는 이때부터 친해졌다. 이씨는 동년배인 전·노 장교들과 모임에 어울려 포커도 하고 술값을 치르곤 했다.
국보위 자문위원 시절 금융정화작업에 간여한 그가 경제비서관에 발탁된 것은 노태우보안사렁관의 주선 때문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5공 초대 청와대비서진 구성은 전문성·능력과 관료경험을 중요시했는데 시중은행 출신인 이씨가 경제수석실의 2인자로 발탁된데 대해 허화평 당시 비서실 보좌관은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전대통령도 역시 탐탁치 않게 여겼다는 것이다. 그는 한달 후 유개공사장으로 나갔다.
민자당의원 A씨는 이씨에게 이런 역할을 권유한 쪽을 전대통령의 11기 동기들로 추정하고 있다. 『이씨는 변화된 환경적응에 뛰어난 사람입니다. 머리 회전이 빠르지요. 그가 위험부담을 무릅쓰고 김상구씨를 통해 메시지를 전한데는 그의 친구들을 통해 전대통령의 심정을 읽고 확신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 친구들은 민간인 출신인 당신이 이린 일에 나서는게 부담이 없을 것이라고 설득했을 겁니다. 그 친구들 중에는 노태우 당시 내무장관도 포함됐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노장관은 두 허씨, 특히 허화평수석이「전대통령 이후」를 겨냥하고 있다고 보고 내심 경계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규동씨 집에 이씨가 자주 드나들면서 청와대의 기류를 가까이 알 수 있었던 것도 그의 행동에 영향을 주었다고 봐야지요』
아직 이 대목은 명확히 알 수 없고 당사자들도 입을 다물고 있다. 다만 그가「움직인지」얼마 안돼 두 허씨가 그만 둔 것만은 사실이다. 그의 역할이 영향을 끼쳤든, 아니든간에 창업과 수성의 차이를 내세운 그의 권력 모험이 성공한 셈이다.
청와대를 물러난 허화평수석은 다음해 1월 미국으로 가기 위해 김포공항으로 향하면서 전화로「I will never forget you till the end of word(난 이 세상 끝까지 당신을 잊지않겠다)」라는 한을 토했다고 한다. 바로 그 you가 이원조씨란 얘기가 있다. <박보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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