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아직 가지 않은 길』 펴낸 고은씨|"흙과 바람 속에「영원」을 본다" 7710년 정든 안성 촌 동네 이 젠 아늑한 고향|"자기갱신 통해 문학정진" 새 다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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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가슴 받힐 듯 강파른 고개 넘어/거기 마음 놓아/지지리지지리 못나도 좋아라/개새끼와 개 사이/그 살가운 것 아껴온 이래/그렇게 몇백 년인가/마을 앞 바람받이 늙은 펭나무 엄하시어라』(「마정리」중) 시인 고은씨(60)가 시집『아직 가지 않은 길』(현대문학간)을 펴냈다. 고씨는 서울에서 차로 두 시간 어름 거리인 경기도 안성군 마정리의 전원주택에 산다. 80년 내란 음모죄로 2년여 영어생활을 한 뒤 엉망이 된 고씨를 주위 사람들이 요양차 내려보낸 곳이 이제 그의 가장 마음에 드는 안식처가 된 것이다.
『80년 남한산성에 갇혀 고문을 당하다 몸도 마음도 없이 구름같이 된 나를 친구들이 전지요양차 이곳에 보냈어요. 그러나한 십 년 눌러 살다보니 이곳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요. 농촌 전통사회 냄새가 나는 마을 사람들도 좋고, 교통이 막히다시피 한 탓에 서울 올라가 어울려 술 마실 기회도 줄어들어 좋고. 아무튼 이곳에서 70∼80권의 책을 펴냈으니까요.』
지난 1년간 『현대문학』에 연재하다 펴낸 시집『아직 가지 않은 길』은 그가 살고 있는 마정리에 바쳐진다. 마정리의 늙은 팽나무·잡초·주민들·새·구름 등을 통해 이 땅의 역사와 사회, 영원과 찰나, 그리고 인간 본연을 노래하고 있다.
『바람 부는 날/풀 보아라/나무 보아라/가만치 있지 못하는 짐승 보아라/이렇게 이 세상 이룩함이여/녹슨 경운기의 침묵과 더불어』(「바람부는 날」중)
고씨는 「가만히 있지 못하는 짐승」이다. 미군부대 군속·중학선생·엿장수·거지·중·민족문학작가회의 회장 등 그의 전력이 말하는 대로 그는 자신의 내부, 혹은 사회와 역사의 바람을 맞아 짐승 같은 활동성과 순진 무구로 살아왔다.
그의 시 세계 또한 그의 본성에 맞게 다양하다. 낯설고 설익은 실존주의의 냄새에서부터 그윽한 선의 세계까지, 아기자기한 서정에서 굵직한 목소리의 민중시까지 고씨의 시 세계는 모든 시적 장르와 경향을 망라한다.
『문학은 영원합니다. 그러나 연대, 무슨 경향에 얽매이지 않고 항상 변해야 영원한 것입니다. 50년대, 60년대 등 문인을 연대로 구분해 그 식의 문학만 추구한다면 어떻게 문학으로 살아남겠습니까. 80년대 민족·민중문학도 그래요. 소위 「농성문학」에만 웅거할게 아니라 이제 그 찬란했던 결과 위에 모든 경향을 아울러 넣는 열린 민족문학으로 나가야 합니다. 어떤 경향과도 만나 그것을 아우르는 민족·민중문학의 「자기해방」을 꾀해야 진정한 문학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70,80년대 민족·민중문학의 견인차 역할을 하며 사회민주화에 기여했던 고씨는 문학의 영원성은 항상 자기경신이 있어야 이룩된다고 강조한다.
『이제 다 왔다고 말하지 말자/천리 만리였건만/그 동안 걸어온 길보다/더 멀리/가야할 길이 있다/……/아직 가지 않은 길/그것이야말로./어느 누구도 모르는 세상이리라/바람이 분다』(「아직 가지 않은 길」중).
올해로 이순을 맞은 고씨는 그러나 아직 어린이다. 온길 보다 가야할 길을 너무나 많이 남긴 반항아다. 불혹이니 이순 이니가 시인 고씨에게는 도대체 어울리지 않은 말이다.『바람이 불면 온 몸으로 새롭게 느끼고 행동할 뿐 무슨 그런 칭사가 필요할까』라고 한다.
시·소설·평론등 지금까지 1백여 권의 책을 펴냈다는 고씨는 올해만도 15권의 책을 펴내고 앞으로 2백 권째 부터 자신이 펴낸 책 수를 세어나가겠다며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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