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송진혁 칼럼] 그 '티코'는 4년 잘 달릴까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정초엔 덕담을 하고 희망을 얘기해야 하지만 올해엔 그런 상례적(常例的) 여유도 느끼기 어렵다. 벌써 신문에 오르내리는 말부터 심상치 않다. 대통령은 6월까진 시끄러울 것이라고 하고, 총선에서 야당이 과반수를 차지하면 정부를 유지할 수 없다고 한다. 정권 안정을 강조한 말이라고 해도 정부 유지를 할 수 없다니 곧 헌정위기가 온다는 말인데 국민에 대한 일종의 협박처럼 들리기도 한다. 야당쪽도 살벌하다. 공천을 둘러싸고 치고받으면서 벌써 분당(分黨)소리까지 나온다. 갑신년 하면 1백20년 전 나라가 망하는 한걸음을 딛게 한 갑신정변이 떠오르지만 올해 갑신년도 조마조마하기만 하다.

*** 갑신년 정초부터 조마조마

올해 우리가 안고 있는 걱정 덩어리가 여러 개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덩어리는 여전히 정치부패와 연관된 정권 불안정 문제다. 대선자금 수사는 계속되고 있고 두 진영의 상처가 얼마나 더 깊어질지 예측하기 어렵다. 나라의 지도세력 자체가 커다란 도덕적.법률적 상처를 안은 채 이 풍랑 거센 바다에서 대한민국호를 이끌고 있으니 이 배가 장차 어디로 갈까. 야당부패는 사법처리하면 된다고 치자. 그러나 대통령의 문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지난 연말 검찰발표로 노무현 대통령은 공금 유용.정치자금법 위반 등의 범법 혐의자가 됐다. 퇴임 후 검찰수사를 받아야 할 판이다. 앞으로 특검팀의 대통령 측근 비리 수사도 주목거리다. 퇴임 후 사법처리 될지도 모를 대통령에게 과연 정상적인 국정수행을 기대할 수 있을까. 손상받은 도덕성과 지도력에다 마음의 부담도 적지 않을 텐데 국정수행에 악영향이 없을 것인가.

예컨대 盧대통령의 재임 중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의 대대적 개편이 예정돼 있고 검찰총장을 비롯한 많은 검찰인사도 예정돼 있다. 인사권을 가진 대통령이 자기 문제를 염두에 두고 우호적인 법원이나 검찰을 구성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지 않을까. 그밖에도 퇴임 후를 대비한 각종 '여건정비'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을까. 그럴 경우 국정왜곡은 누가 막나. 당장 총선에 임하는 盧대통령의 자세부터 예사롭지 않다. 총선에 사활(死活)을 건 인상이다. 뭔가 무리할 것 같은 느낌이다. 盧대통령은 아직 여당원도 아니면서 벌써부터 "민주당 찍으면 한나라당 돕는 것" "한나라당 과반수면 정부 유지 불가능"등의 노골적 발언을 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가다가 과연 이 선거가 탈없이 치러질지, 선거 결과 정국이 다소나마 진정될지 새해벽두부터 걱정이 치솟고 있다.

盧대통령의 말대로 하면 이 정부는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정부다. 검찰수사에서 불법 대선자금이 10분의 1이 넘어도 물러가야 하고, 총선에서 한나라당이 과반수를 차지해도 정부는 유지될 수 없다고 한다. 측근 비리에 따른 재신임 문제도 걸려 있으니 그 결과도 미지수다. 이런 일들의 결말이 올해 안에는 나올 테니 올해야말로 盧정권과 우리나라의 중대한 갈림길이 되는 셈이다.

연말.연초 여러 자리에서 논란이 분분했다. 대통령의 중도사퇴는 안 된다는 주장과 이대로 4년을 더 갈 수는 없다는 주장이 갈렸다. … 대통령의 중도사퇴는 헌정 변칙 상황을 부르고, 권한대행의 과도정부, 60일 내의 새 대선 등으로 온 나라가 혼란과 격동에 빠진다. 어느 정당도 준비된 후보가 없으니 그 혼란을 어떻게 감당할까. … 맞는 말이다. 반면 …도덕성과 지도력에 중대한 손상을 입고 퇴임 후 사법처리될지도 모를 대통령으로 어찌 4년을 더 견디겠는가. 대외적으로도 창피하다. 한차례 혼란을 각오하고라도 4년을 살려야 한다. … 역시 맞는 말이다.

*** 헌정 위기 여부 대통령에 달려

중도사퇴든 '정부 유지 불능'이든 헌정위기이긴 마찬가지다. 1백20년 전의 그것과는 다르지만 '제2의 갑신정변'이라고도 할 사태가 된다. 오직 盧대통령만이 이런 최악의 코스를 피할 수 있다. 임기존중론과 사퇴국익론(國益論) 중 어느 쪽이 힘을 얻느냐는 그가 하기에 달렸다. 혼란 속에서도 중심을 잡고 국정을 안정적으로 끌고간다면 임기존중론이 힘을 얻을 것이다. 반대로 무리수를 두고 편을 가르고 정치게임에 집착하면 사퇴론이 득세할 것이다. 기름 많이 먹는 상대방의 리무진은 오래전에 주저앉았지만 자기의 티코가 4년을 잘 달릴지는 자기에게 달렸다.

송진혁 논설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