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할린서 영주귀국 66세 윤 하 기 할머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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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참으로 기막힌 세월이라. 앞으론 우찌될지…혹 간첩으로 몰리는 거 아이가』
18살 꽂다운 색시로 사할린에 왔다가 고희를 바라보는 나이에야 동토를 나서게된 윤하기할머니 (66) 는 20일 김포국제공항에 내려서도 못내 불안한 표정이었다.
대한적십자사의 주선으로 다른 사할린거주무의탁노인 41명과 함께 영구귀국키위해 아시아나 전세기에 몸을 실은 윤할머니가 고국땅을 밞고서도 홀가분한 모습을 보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할머니는 태평양전쟁때 징용으로 끌려나간 아버지를 찾기위해 어머니 손에 이끌려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했다.
거기서 천신만고 끝에 아버지를 만났고 18세되던 해인 1944년4월 부모님소개로 첫번째 남편 신석초씨 (일본명 아사모토)와 결혼했다.
결혼하자마자 남편은 사할린 마카로시에 계신 부모님을 뵈러가자며 어린 신부를 사할린행 여객선으로 끌어들였고, 이로써 윤할머니는 차디찬 사할린의 빙벽속에 갇히고 만 것이다.
남편 신씨가 1년만에죽자 창졸간에 청상과부가 된 윤할머니는 밭일, 탄광일, 청소일등을 가리지않고 닥치는대로 열심히 일한 덕분에 조그만 집한칸이라도 마련할 수 있게 됐다.
할머니는 60년 극단가수였던 두번째 남편 서봉기씨와 결혼했으나 서씨는 슴씀이가 헤펐고게다가 당뇨법까지 걸려살림은 곧 거덜이 나고 말았다.
서씨가 82년 병사하자 이젠 할머니몸도 늙고 병든 상태여서 예전처럼 악착같이 돈을 벌어 생계를 꾸려나갈 수 없었다.
걸인같은 생활이 수년간 계속돼 더 이상 버티기 어렵다고 생각될 즈음인 90년 할머니는 이웃들의 소개로 지금의 남편인 윤광수씨를 만났다.
북한에서 탄광노동자로 일하다 소련의 고기잡이 인부로 모집돼 사할린에 건너왔다는 남편은 이미 아들 하나에 딸둘을 데리고 있었다.
『남편이 죽으면 남의 자식들이 나를 제대로 돌봐주겠소. 밤잠 설치고 고민한 끝에 고국에 돌아가 죽기로 결심했지.』
윤할머니는 그러나 북한인 남편과 살다왔다고해서 간첩으로 오해받지나 않을까 가장 걱정된다고 했다.
『살던 집을 팔아 40만루블 받았지. 일본돈 5만엔 (한화 약 35만원)으로 바꿔놨는데 이 돈같으면 고국에서도 집한칸은 살 수 있겠지』 윤할머니는 「전재산」이 들어있는 쌈지주머니를 바지위로 쓸어보며 아주 든든하다는 표정이었다 . < 진세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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