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러 관계 냉전 후 최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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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영국과 러시아의 관계가 냉전 이래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영국 정부는 16일 살인 용의자 안드레이 루고보이의 신병 인도를 거부하고 있는 러시아에 대한 보복으로 러시아 외교관 4명을 추방하기로 했다. 루고보이는 지난해 말 런던에서 독살당한 알렉산드르 리트비넨코 러시아 연방보안부(FSB) 전직 요원의 살인 용의자로 지목돼 왔다.

러시아는 영국의 외교관 추방에 맞서 상응 조치를 취하겠다고 경고했다. 영국 싱크탱크 채텀하우스의 러시아 전문가 제임스 닉시는 "양국 관계는 1970년대 이래 최악"이라고 진단했다고 일간 가디언이 전했다.

데이비드 밀리반드 영국 외무장관은 16일 의회에서 "사건의 심각성에 대해 명백하고 적절한 신호를 러시아 정부에 보내기 위해 4명의 외교관을 추방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고든 브라운 총리도 "(러시아 측이 루고보이의 신병 인도 요청에) 협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러시아 외무부 대변인 미하일 카미닌은 "영국의 입장은 비도덕적"이라며 "영국 당국이 배후 조종한 도발적 행동에 응답이 따를 것이고, 양국 관계에 매우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응수했다.

그러나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대변인 드미트리 페스코프는 "필요한 대응 조치를 취하겠지만, 핑퐁 게임에 빠져들기를 원치는 않는다"고 말했다. 영국에 의해 살인 용의자로 지목된 루고보이는 러시아 TV를 통해 살인 혐의를 부인했으며 "영국의 주장은 정치적 의도"를 지닌 것이라고 주장했다.

영국 정부의 결정에 따라 정보 업무를 담당하는 러시아 외교관 4명이 수일 내 추방될 전망이다. 당분간 러시아 관리의 영국 방문도 어려워질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도 영국처럼 모스크바 주재 영국 외교관을 추방할 수 있다. 영국 기업인의 러시아 여행에 제한이 가해질 수도 있다. 영국은 러시아의 석유.가스 부문에 투자하고 있다.

버밍엄대학의 러시아 전문가인 데렉 아베르는 "영국의 외교관 추방에 맞서 러시아의 보복 조치가 따르겠지만 러시아가 이 문제를 더 악화시키거나 양국 간 경제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데까지는 가지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러시아가 사태를 악화시켜봤자 국익에 도움이 될 게 없다고 판단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경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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