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선민기자의가정만세] 잘나가는 딸 vs 부모 모시는 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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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세 자매 중 둘째인 주부 A씨(44). 언니는 의사, 여동생은 약사다. 둘 다 늘 ‘바쁘다’ ‘피곤하다’는 두 마디를 입에 달고 산다. 그래서 친정어머니를 챙기는 일은 대부분 전업주부인 A씨에게 넘어온다. 어머니가 무릎이 아프면 병원에 모시고 가고, 장도 함께 보러 간다. 심지어 어머니에게 걸려온 ARS 응답전화도 대신 받아 처리한다. 해마다 한 차례 건강검진에 모시고 가는 것도 A씨의 몫이다. 집안에 제사라도 있는 날이면, 일하느라 피곤할 다른 자매보다 몇 시간 일찍 친정에 도착해 어머니를 돕는다. 겉으로만 본다면 ‘인생 최고의 블루칩은 딸’이라는 얘기에 딱 들어맞는, 흐뭇한 모녀지간이다.

 그런데 알고 보면 A씨의 속은 콧바람만 쐬어도 곧 내려앉을 서까래처럼 시꺼멓게 썩어 있다. “남들이 딸 얘기를 물어보면 엄마는 의사 맏딸과 약사 막내딸 얘기만 하세요. 일거수일투족을 보살피는 둘째딸 얘기는 쏙 빠지죠. ” ‘착한 딸’보다 ‘장한 딸’을 우대하는 어머니의 태도에 서운함이 말도 못한다는 얘기다. A씨는 자신을 재주는 죽어라 넘고 돈은 고스란히 남에게 내주는 곰에 비유했다.

A씨처럼 졸지에 사람에서 곰 신세가 되는 건 딸뿐 아니다. 아들·며느리·사위 등 다 마찬가지로 ‘착한’보다 ‘장한’ 쪽으로 부모의 부등호가 향하는 추세다. 하긴 장한 자식은 내놓고 자랑할 거리가 있으니 좋고, 자랑하는 가운데 자신의 위상도 ‘장한 부모’로 올라가는 것 같으니 더욱 좋을지 모른다. 게다가 장한 자식은 아무래도 경제력도 앞서게 마련이다. 남들에게 여봐란 듯 내놓을 수 있는 감투와 품안에 간직하며 흐뭇해할 수 있는 봉투. 예나 지금이나 어르신을 공략하는 필살기다.
 사실 A씨의 얘기를 쓰게 된 건 그 다음에 이어진 말 때문이었다. “장한 딸과 며느리, 장한 아들과 사위를 선호하는 세태가 교육에 대한 가치관마저 바꿔놓은 게 아닐까요. 공부 잘하는 게 제일 중요하다, 더 나아가 성공만 하면 웬만한 건 용서된다는 식으로 말이지요.” 일리가 충분하다.

 어디 교육뿐이랴. 회사생활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어느 곳에나 티는 나지 않지만 누군가는 꼭 해야 할 일이 있다. 불행히도 세상은 그런 일을 묵묵히 하는 사람을 점점 알아주지 않고 있다. 그러다 보면 이런 사람들도 A씨처럼 어느날 문득 ‘나는 곰인가’ 하는 자괴감에 빠질 수 있다.
 당부컨대 세상의 모든 부모들은 더 이상 착한 아들과 며느리, 딸과 사위를 서운한 곰으로 만들지 마시라. 곰들이 있기에 당신들의 일상이 편하고 즐거운 것 아닌지. 알면서도 내색 안 한 거라면 오늘부터 부디 곰들의 쓰린 속을 다독여주시길.  

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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