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영 가족 소설 - 즐거운 나의 집 [3부] 가을 (99)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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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그림=김태헌

나는 문득 그 동화가 얼마나 현명한지 알 수 있을 거 같았다. 왜 그 제목이 현명한 재판관인지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서로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실은 사랑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때로는 정의보다는 사랑이고 이해라는 것은 물론 더 많은 세월이 지난 다음에야 알게 되었지만 말이다. 새엄마는 상처 입은 얼굴 그대로 굳어져 갔다.

“엄마는 낳아준 사람을 부르는 호칭이에요. 혹은 거기에 준하는 사람을 말할 때, 본인의 자발적 의지에 따라 하는 거구요. 이 세상에는 나쁜 엄마도 있을 수 있는 거구, 그러니 그 호칭도 꼭 좋은 것도 아니고, 아줌마라는 호칭도 꼭 나쁜 것은 아니잖아요?”

내가 말하자 새엄마의 얼굴은 더 굳어져 갔는데 그때 하필이면 아빠가 내 말을 곰곰이 생각하더니 “그건 위녕이 말이 일리가 있네요”라고 했다.

새엄마가 나에게 했던 일들에 대한 미움은 그녀가 아빠의 말이 끝난 직후 울기 시작하자 당혹스러움으로 변해갔다. 나는 예전에도 새엄마가 나와 다투고 우는 것을 몇 번 본 일이 있기는 했다. 그런데 그때는 나 역시 아빠에 대한 서운함으로 울고 있었으므로, 나 자신의 슬픔에 겨워 새엄마를 헤아릴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아빠와 내 앞에서 울고 있는 새 엄마를 보자 이상한 연민이 내 안에서 돋아나고 있었다. 나로 말하자면 그런 감정이 약간은 당혹스러웠고 그 와중에도 나 자신이 좀 대견스럽기도 했다. 아빠는 대체 여자들은 왜 말문이 막히면 잘 논리적으로 전개를 해서 문제를 풀지 않고 이렇게 울기부터 하는지 약간은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제 말을 꼭 나쁘게만 받아들이지는 마세요.”
 
내 말투는 어느덧 누그러져 있었다. 그 순간처럼 여자인 새엄마를 아빠보다 더 많이 이해했던 순간은 아마도 없었을 것이다. 새엄마는 눈물을 닦더니 “그래, 그건 그렇긴 하지” 하고 말했다. 아마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새엄마도 그 순간만은 울고 있는 그녀를 아빠보다 내가 더 잘 이해하고 공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새엄마는 중학교 윤리 교사인 그녀 특유의 냉정함을 되찾으려는 듯 어깨를 한번 추스르더니 “위녕 어쨌든 오랜만에 서로 만났는데 차라도 마실래?”라고 했다. 갑자기 이 모임이 엄마 집에 다니러 갔던 딸이라도 맞는 분위기로 순식간에 돌변하는 것 같아 좀 이상하긴 했지만 나는 그냥 “네” 하고 대답했다.

잠시 후에 새엄마는 정갈한 다기 세트에 차를 만들어 왔다. 참 이상하다. 비로소 나는 새엄마의 이런 깔끔하고 단정한 분위기를 내가 좋아하기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자 문득 만일 이 사람이 내 친엄마이고 우리 엄마가 새엄마였다면 나는 새엄마인 우리 엄마를 어떻게 비난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네가 엄마 집으로 갔다는 얘기를 네 아빠에게 전해 듣고, 실은 며칠 동안 잠을 못 잤었어. 배신감 때문이었지.”

새엄마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정직하게 울렸다. 나는 우리가 만났던 아주 초창기 때 이런 목소리로 대화를 했었다는 사실을 다시 기억해 냈다. 그러나 그것이 지난 7년 동안은 아무 소용이 없었던 것이었다. 우리는 어쩌다가 이런 사이가 되어 버렸을까?

“나… 처녀 몸으로 네 아빠를 사랑해서, 사랑 하나만 가지면 모든 것을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부모님이 걱정하며 결혼을 말리셨지만 맹세코, 너를 사랑할 자신이 있었어. 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세상에 나오는 모든 새엄마에 대한 동화 따위는 다 지어낸 이야기가 될 거라고. 미안하다, 때렸던 거, 설거지하라고 혼낸 거…. 난 그게 다 교육인 줄 알았던 거야. 아빠가 네게 너무 오냐오냐, 하는 거 같아서, 그리고 네가 규율 지키는 걸 너무 싫어하고 자유분방한 거 같아서…. 나라도 엄하게 널 키우는 게 도리라고 생각했던 거야….”
 
새엄마의 목소리는 다시 울먹이고 있었다.

“정말 그렇게 믿었다. 그런데 위현이가 커가면서 나도 알게 되었지. 그게 너한테 얼마나 큰 상처를 준 일인지. 너는 반항했지? 왜 내게는 그렇게 했으면서 위현이에게는 너그럽게 하느냐고? 하지만 말이다 위녕, 네게 잘못한 걸 알면서 공평하자고 위현에게 그럴 수는 없는 거였잖아? 너는 그것을 차별이라고 느꼈겠지만, 그리고 그게 당연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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