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이라마, 한국인에 첫 법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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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종교만이 아닌 이웃의 종교 역시 존경하고 이타행(利他行)을 실천하십시오."

세계 불교계의 정신적 지도자로 인정받는 티베트 망명 정부의 달라이라마(69.본명 텐진 갸초)가 한국 불자를 대상으로 첫 대규모 법회를 열었다. 지난해 12월 29~31일 사흘간 인도 북부 다람살라의 남걀사원에서 한국인 3백여명에게 새해를 맞는 불자의 마음가짐에 대해 설법했다.

달라이라마는 "나와 타인이 연기(緣起)에 의해 서로 의존하고 있다는 부처의 가르침을 직관할 때 비로소 이타행을 올바르게 수행할 수 있다"고 말했다.

여수 석천사(주지 진옥 스님)가 주관한 이번 자리는 달라이라마가 한국 대중을 위해 처음으로 베푼 공식 법문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그동안은 종단 혹은 개인 차원에서 그를 예방했었다.

달라이라마는 법문에서 특히 '나'라는 개별적 존재를 경계했다. "'나'라고 생각하는 순간 결국 '나'를 놓을 수 없고, 그로 인해 항상심(恒常心.변함이 없는 올바른 마음)을 볼 수 없는 '무명(無明)의 상태'에 놓이게 된다"며 "'나는 항상 독립할 수 없다'는 진리를 바르게 본 뒤, 항상 다른 이의 행복을 추구하는 게 바로 이타행"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깨달음을 얻고 실천하는 데 종교의 구분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행사에 참석한 강북삼성병원 이시형 박사는 "달라이라마는 현재 중국의 압력으로 망명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에게선 전혀 긴장감을 찾아볼 수 없었다"며 "명성에 비해 성격이 대단히 소탈해 보였다"고 말했다.

달라이라마는 한국인에게 '보살행에 이르는 길'을 제시해 놓은 티베트 경전 '입보리행론(入菩提行論)'을 주제로 설법했다. 총 10장 가운데 4장까지 강의했다. 나머지 부분에 대한 법문은 올 10월께 속개될 예정이다.

달라이라마는 뛰어난 유머 감각도 발휘했다. 한국과 중국의 외교 문제로 그의 방한이 계속 미뤄지고 있으나, 이에 대한 서운함 같은 건 내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갑자기 추워진 현지 날씨를 의식한 듯 "한국 스님들의 유난히 빛나는 머릿빛으로 추위를 이겨내자. 혹시 머리가 시린 스님들은 모자를 써도 좋다"며 스스로 법의를 뒤집어 쓰는 등 여유로운 모습을 보였다. 한국 불자들의 요청으로 개최된 이번 행사에는 이탈리아.이스라엘.스페인.폴란드 등 세계 30여개국 불자 3천5백여명도 함께 했다.

한편 달라이라마 방한준비위원회 정웅기 사무국장은 "달라이라마 방한은 민감한 외교 문제가 누그러질 것으로 보이는 내년께 재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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