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들 실명으로 다뤄 화제 이문구 연작소설집 『유자소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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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이문구씨(52)의 소설은 재미있다.『관촌수필』 『우리동네』 『매월당 김시습』등 66년 문단에 나온 이래 이씨가 발표한 10권 가량의 작품들은 넉넉한 세상보기와 구수한 이야기거리로 밤새워 읽게 만들지만 그렇다고 쉽게쉽게 책장이 넘어가지는 않는다. 그냥 넘기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깔깔하고 쫄깃쫄깃한, 혹은 전아한 우리 고유의 말·문체가 곳곳에 배어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씨 소설의 맛을 한껏 보여주는 신작 소설집 『유자소전』 (벽호간)이 최근 출간됐다. 본격 소설집으로는 10년만에 내놓은 이 책에는 이씨가 살아오면서 만난 사람들을 실명으로 다룬 단편 10편이 연작 형태로 들어있다.
『조실부모해 유달리 외로움을 타다보니 제 주위엔 혈육의정이 느껴지는 사람들이 괘 많이 있습니다. 저에게 이렇게 좋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리려고 실명인물 소제를 썼습니다.』
온갖 세파를 붙임성과 의리로 헤쳐나가다 죽은 고향친구, 무위도식과 가투방황으로 저물어간 정치 꾼들, 공사판만 전전하다 칠순에 접어든 노가다 십장, 평생 농사로 지새다 끝내 목매단 촌노 등 이씨가 다룬 인물들은 그의 신산했던 삶만큼이나 다양하다. 붙임성 있는 고향친구는 말할 것도 없고 남에게 손가락질 당하는 정치건달이며 고집불통의 머슴, 막 돼먹은 십장들도 그의 소설에서는 혈육의 정이 느껴질 정도로 아주 따뜻하게 그려진다. 그건 이씨가 지닌 따뜻한 세상보기·사람보기의 버릇과 함께 그 특유의 문체에 기인된다.
『제법 시골에서는 잘 살던 집, 6 ·25로 가족들이 풍비박산 나자 큰 사랑채엔 전쟁과부 아주머니들만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을 위해 『춘향전』『옥단춘전』등 우리고전소설들을 밤마다 읽어 드렸지요. 우리말의 호흡·가락을 조절하면서 이야기를 들려주면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분들도 다 알아듣고 웃고 눈물을 흘립디다. 그「옛날 이야기 들려주기」는 또 내 최초의 독서이고 문학과의 만남이기도 했습니다.』
이씨의 문체는 판소리계 소설에서 나왔다. 고전소설의 가락·해학에 끊임없이 생활현장에서 쓰이고 있는 우리구어·토속어를 집어넣는다.
이 작품집의 많은 부분은 이씨가 80년대 말부터 내려가 살고있는 고향 충남 대천농민들에게 바쳐진다. 그러나70년대 그곳 농민들을 해학적으로, 생기발랄하게 그린『우리 동네』연 작과는 분위기 가 사뭇 다르다.
『따뜻하고 흐뭇한 농촌이야기를 쓰려고 고향에 왔는데 그런 소재를 찾기가 참 힘들어요. 도시당 값은 올라도 자고 나면 떨어지는게 농지 값 아닙니까. 논밭 팔아 서울은 못 가더라도 수원·안양까지는 식솔들을 데려가 살고 싶은데 경자유전이란 허울아래 농지 값만 떨어뜨려 놓고 팔리지도 않으니 농민들이 기가 막힐 노릇이지요. 이제 농촌도 제발 좀 신명나게 만들어주어야겠어요.』
이건 보다 재미있는 농촌소설을 써야겠다는 작가 이씨의 바람이 아니라 새 정부에 거는 진짜 농민들의 피맺힌 희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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