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르비 전철밟는 옐친/권력누수 심해 지시 안먹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국민투표문제 등 2년전 모습 반복
보리스 옐친 러시아대통령이 미하일 고르바초프 구소련대통령을 권좌에서 몰아내고 러시아를 독립의 길로 이끈지 채 2년도 안돼 고르바초프가 밟았던 것과 같은 정치적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루슬란 하스불라토프 최고회의(상설의회) 의장과 치열한 권력다툼을 벌이고 있는 옐친대통령은 내전발발 가능성을 경고하고 있다. 하지만 옐친대통령이 강경 보수주의자들에게 아무리 양보해도 이미 시작된 자신의 권력누수현상을 막을 길이 없는 것같다. 잇따른 경제 포고령도 중앙정부의 통제로부터 벗어나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는 지방정부들에 의해 무시되고 있다.
옐친대통령은 지난날 자신의 최대 정적이었던 고르바초프의 전철을 되밟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모스크바의 한 서방 외교관은 『이는 과거에도 모두 있었던 일이다. 역사는 다소 흥미롭게 반복되고 있을 뿐』이라면서 『최근의 옐친대통령은 재임 마지막 몇달동안의 고르바초프를 연상시킨다』고 말했다.
지난 90년 6월 러시아최고회의 의장으로 선출된 옐친은 의회의 주도권과 권력확대를 추구하면서 고르바초프를 무시하고 그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하스불라토프의장은 옐친덕분에 강화된 의회의 힘을 사용,러시아 대통령의 지위를 영국 여왕처럼 상징적 지도자의 위치로 끌어내리려 하고 있다.
옐친대통령이 하스불라토프의장과의 싸움에서 동원하고 있는 일련의 조치들은 고르바초프가 옐친의 공격으로부터 소연방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과거를 기억나게 한다.
고프바초프의 문제는 90년 9월 개혁파가 제시한 급진경제개혁안을 거부했을때,그리고 대통령 취임 6개월만에 권력의 사실상 「증발」을 실감하게 됐을 때부터 본격적으로 돌출하기 시작했다. 같은해 12월 고르바초프는 보수파의 공세에 굴복,행정부내 진보적 성향의 인물들을 보수강경파들로 교체하기에 이르렀다.
옐친은 이에 대해 고르바초프가 보수파 압력에 굴복해 민주개혁을 외면하고 있다고 맹렬히 비난했다. 그로부터 1년이 흐른 지난해 12월 옐친대통령도 우익 보수진영의 비난을 무마하기 위해 자신의 오른팔 예고르 가이다르총리서리 등 상당수 측근들을 경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의 권력을 약화시키려는 의회의 공격을 막지 못했다. 옐친대통령은 내달 11일 『누가 러시아를 통치해야 하는지 묻기 위해』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고 밝혀놓고 있다.
고르바초프 역시 91년 3월 소련의 장래를 결정하기 위해 국민투표를 실시했고,투표자의 약 70%가 소련이 초강대국 지위를 계속 유지하는데 찬성했다. 옐친은 당시 국민투표에 질문을 하나 덧붙여 러시아 연방 주민들이 자체 대통령을 원하는지 물었다. 대답은 압도적 찬성이었으며 옐친은 이에 힙입어 러시아 최초의 대통령 선거를 실시할 수 있게 됐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아이로니컬하게 하스불라토프의장이 지금 옐친대통령이 실시하자고 요구한 국민투표에 자신의 질문을 첨가해주길 원하고 있다.
고르바초프와 옐친은 모두 중앙정부에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던 지방 정부쪽에 지지를 호소했으며,그 대가로 권력 일부를 양보하겠다고 제의했다. 옐친대통령 통치하의 러시아정부는 지방정부들의 경제적 분리 요구를 잠재우기 위해 이들에 대한 재정지원을 확대하는 한편 지방세 징수를 위해 권한을 강화해 주겠다고 밝히고 있다. TV 정치분석가인 예브게니 키셀료프는 현러시아 정국이 91년 8월 쿠데타 발발 직전의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고 지적하고,옐친대통령도 지금 쿠데타 위협에 직면해 있다고 진단한다.<로이터=연합>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