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장제 놔둘 필요있나/최철주(중앙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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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어느 국영기업체 이사회에서 주요투자사업과 관련된 안건이 상정됐다. 이사장은 회의진행을 맡고 있는 부서에서 적어준대로 안건내용을 읽었다. 이의가 없다는 이사들의 동의가 있은후 그는 몇백억원 규모에 이르는 사업이 원안대로 의결됐음을 선언했다. 6개월이 지난후 그는 어떤 자리에서 자신이 통과시킨 그 안건의 구체적인 내용도 잘 알지 못했고,그 사업이 충분한 경제성을 가지고 있는지조차 파악할 수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더욱이 그는 경영에 관련된 용어의 정확한 개념을 알지 못해 각종 자료를 소화하는데 무척 애를 먹었다.
○인사·보수해결의 방편
정부가 가장 혹독하게 여론의 공격을 받아야할 경우란 세금을 똑바로 쓰지 않을 때다. 예산이 낭비되는 가장 대표적인 케이스가 「자리」에 대한 비용이다. 산업이 고도화될수록 국가인력의 소요분야는 계속적으로 발생한다. 정부의 각 부처가 국을 만들고 과를 설치하며 산하에 있는 공기업의 규모를 확대시켜 왔다. 시간이 흐른 뒤에 보면 그때 생겼던 새로운 기구와 상위직 증설이 인사와 보수해결의 방편이 아니었느냐 하는 비난을 받아야 할 곳이 여러군데 발견된다.
국영기업체의 이사장 자리는 이러한 범주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성급하게 결론을 내린다면 이 제도는 새정부의 출범과 함께 폐지되는게 옳다. 그렇지 않고서는 차기대통령의 신경제론은 그저 선진국대통령의 경제정책을 흉내낸 정도의 허울만 좋은 정책으로 여겨질 위험이 있다. 새정부의 주장대로라면 우리는 지금 개혁의 시기를 맞았다. 정부의 조직편제를 기능과 효율위주로 개편한다는 방침도 세워놓았다. 여기서 공기업들이라고 예외가 될순 없다.
사기업들마저 뼈를 깎는 아픔으로 중역의 수를 줄이고 각종 기구를 통폐합하고 있다. 공기업 시스팀이 안고 있는 시대적 모순은 여러가지 측면에서 나타난다. 그중 현행 이사장제는 정부가 부담스러워 하는 「원로」들을 대접하는 자리였다. 5공과 6공 1기 정부가 두고 두고 정치적으로 이용해왔던 23개 국영기업체 이사장 자리를 김영삼 차기대통령은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가 벌써부터 주목받고 있다.
○전문성없어 폐지 마땅
전임대통령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가 이사장 자리를 역시 정치인 및 군과 전직 고위관료들의 쉼터로 여긴다면 앞으로 민간부문의 창의적인 활동을 기대한다는 이야기를 더이상 거론하기가 쑥스러워질 것이다.
이사장이 집행기구가 아닌 의결기구의 장이라고 해서 경영에 큰 흠집을 낼 일도 없으며 의사봉이 벌거냐하고 생각한다면 큰 일이다. 어느 정도의 경륜과 전문성을 갖춘 인물을 앉히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제도 자체를 없애는 것이 국민경제를 위해 훨씬 낫다. 시장개방이 확대될수록 공기업과 사기업,그리고 외국기업과의 경쟁 가열은 피할 수 없게 된다.
이런 판국에 공기업의 높은 자리는 정치적으로 배분되고 경영에서 적자가 생기면 세금으로나 메워준다면 이처럼 화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사양산업을 관장하는 어느 적자 공기업은 관리직이 무려 20% 정도에 이르는데도 대책은 까마득하다.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꽤나 많은 인물들이 교체될 것이다. 정부조직의 축소개편으로 퇴임하는 관료들을 포함해 각 분야의 내로라하는 인사들의 이동이 시작된다. 그냥 물러나는 사람과 비적격자라는 이유로 쫓겨나는 고위 당국자들의 신분상의 변동은 공·사기업을 불문하고 여러가지 형태로 나타날 것이다. 현재 정부가 수행하는 국가기능을 소단위로 분류해 보면 약 1만6천개에 이른다.
정부가 국민에게 서비스해야할 행정기능이 늘어나고 이중 상당한 비중이 지방자치단체나 공기업 또는 민간부문으로 위임되고 있는 추세다.
○신분사회 병폐 고쳐야
행정에 투자되는 세금과 이로부터 얻어지는 서비스의 양과 질이 좋아지려면 이들 기관의 높은 자리에 좋은 사람을 앉혀야 한다. 청와대 비서실 자리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퇴임 장관이나 예비역 장성,정치인들 및 경제관료들이 갈 자리는 극히 한정되어 있다. 일부 인사들이 대학 강단에 설 수 있도록 정부예산으로 지원하는 방안도 검토된 바 있으나 헛수고로 끝났다. 기득권 침해를 우려하는 대학에서의 반발도 어지간하거니와 원로 자신들도 지속적인 학문연구에 자신을 보이지 못했다. 높은 직책에 있다가 물러나는 사람들이 퇴임후에도 상당한 신분을 유지하고 싶어하는 고욕구에의 관성에 스스로 제동을 걸 수 밖에 없다.
지역사회에 봉사할 수 있는 것으로 만족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대만의 경우처럼 정부가 이들에게 주요 공기업의 무급자문위원이나 고문이라는 직함만을 주고 경영에는 일절 관여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도 방법이다. 신분사회의 병폐를 얼마만큼 고쳐나가느냐 하는 것은 개혁의 성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변수다.<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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