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랜드 사태로 본 비정규직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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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에버 목동점에서 근무하는 비정규직 주부사원 김모(43)씨는 "까르푸 시절부터 이곳에서 일해 매달 80만원 조금 넘는 돈을 받아 자식들 뒷바라지하고 있는데 앞이 막막하다"고 하소연했다. 그는 "까르푸가 이랜드에 인수될 때 우리들 고용까지 모두 보장한다고 해서 안심했는데 비정규직법이 시행되자 하루아침에 헌신짝 팽개치듯 했다"고 말했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해고에 항의하는 민주노총과 이랜드 노조 조합원들의 매장 점거 농성은 8일에 이어 9일에도 계속됐다. 점거 매장은 13곳에서 서울 월드컵점과 뉴코아 강남점 킴스클럽 두 곳으로 줄었다. 두 매장에는 부산.울산.순천 등 각 지역에서 올라온 노조원들이 합세해 600여 명이 계산대와 제품 진열대를 가로막고 농성 중이다.

이랜드 노조 조합원의 점거 농성은 사회적 약자인 비정규직 근로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법이 이들을 거리로 내몬 대표적인 사례다.

경영계와 노동계에서는 앞으로 시간이 갈수록 이런 현상이 더욱 심해질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한국경영자총협회 이동응 전무는 "이랜드 사건과 같은 비정규직 일자리 상실은 이미 예고된 상황이다. 자유로운 인력운용을 저해하는 규제를 만들면 필연적으로 기업의 고용감축을 초래한다"고 말했다. 특히 경영이 빠듯한 중소기업 가운데는 노사갈등을 감수하고서라도 '비정규직 해고' 카드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어서 근로자들의 불안감은 더하다. 대기업에 종사하는 비정규직 근로자는 전체의 7%에 불과하며, 나머지 93%가 중소기업에서 근무하고 있다.

◆전전긍긍하는 중소기업 근로자=비정규직보호법을 어기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차별하면 건당 최고 1억원의 과태료를 물어야 한다. 기업들은 이를 피하기 위해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한다. 비정규직을 아예 정규직으로 전환시키는 것이 그중 하나다. 삼성홈플러스, 롯데마트, 신세계백화점, 신세계 이마트, 현대자동차, 부산은행, 하나은행 등이 그 예다. 이 기업들은 경영상태가 좋았기 때문에 정규직 전환이 가능했다.

다른 하나는 비정규직을 털어내 정규직과의 차별 얘기의 싹을 자르는 것이다. 까르푸를 인수하며 막대한 자금을 쏟아 부어 경영압박을 받는 이랜드는 일부를 정규직화하고 나머지는 외부인력을 활용하기로 했다. 적지 않은 중소기업들은 까르푸와 같은 방법으로 비정규직 딜레마를 돌파할 생각을 하고 있다. 경기도 안산에서 금형 공장을 운영하고 있는 김모(43)씨는 "비정규직 전환 시점이 앞으로 2년 남았지만 모두 정규직으로 전환시킬 수는 없다"며 "직원 수를 줄이든지 일부 공정을 외주를 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 구로선경오피스텔에서는 8일 비정규직 근로자들이 용역 전환에 반발, 농성을 벌이다 사측이 투입한 용역직원과 물리적 충돌을 했다. 서울 송파구청과 서울대병원.광주시청.청주대 등 민간과 공공부문을 막론하고 기존 비정규직의 계약 해지와 외주화를 둘러싼 마찰이 있다.

소한섭 중소기업중앙회 기업정책팀장은 "비정규직 보호법안 자체가 대기업 중심으로 논의되고 제정돼 중소기업의 목소리는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며 "중소기업들은 사정이 열악해 대책을 세우지 못한 채 관망만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인력난 때문에 비정규직을 자를 수도 없고, 정규직으로 전환하자니 자금이 달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다.

김기찬.이현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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