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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보험 패러다임을 바꾸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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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절대빈곤에서 벗어나던 시기인 1977년 도입한 의료보험제도가 올해로 30세가 됐다. 제도 도입 12년 만인 89년 전 국민 의료보험을 달성했으며, 2000년 7월에는 보험제도의 통합과 함께 건강보험으로 이름을 바꾸기도 했다. 또한 전 국민 의료보장을 하면서도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민의료비가 2004년 5.6%로 전 국민에게 의료를 보장하는 국가치고는 매우 낮음을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제도를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자랑만 하기는 어렵다. 국민의료비 지출이 적어 보험료 부담이 선진국에 비해 낮다는 점에 대해서는 많은 국민이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하지만 의료 현장을 보면 상황은 달라진다. 환자들은 진료시간이 2~3분으로 짧아 의사에게서 질병의 상태나 진료 내용에 대해 충분한 설명을 듣기 어렵다고 불평한다. 자신의 질병이나 진료 내용을 제대로 알지 못함에 따라 진료의사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고, 한번 진료에 차도를 느끼지 못하면 다른 병원이나 의사를 찾는 ‘의료 쇼핑’이 일반화하고 있다. 의사를 찾아가는 횟수가 늘어나 1년간 의사 방문 횟수가 미국이나 영국의 두 배를 넘고 있다.

  병·의원도 보험수가가 낮다 보니 선진국처럼 환자를 하루에 30~40명 정도 보는 것이 아니라 최소 80여 명은 봐야만 경상운영이 가능하다. 이러니 환자에게 충분히 설명할 수가 없다. 의료 공급자인 병·의원은 박리다매형 의료를 통해 경상수지를 맞추는 현 제도에 불만이 많다. 암과 같은 난치성 질병에는 건강보험이 새로운 의료기술을 제한적으로만 허용하기 때문에 돈이 있는 환자라도 치료에 어려움을 겪어 이들이 외국으로 빠져나가는 문제까지 있다.

 건강보험 통합 이후 보험재정은 빠르게 증가해 보험료 부담이 매년 늘어나고 있다. 게다가 보험료 부과 방식이 잘못돼 근로자의 부담이 더욱 높아지는 문제도 있다. 보험재정이 급증하는 것은 급여확대도 한 원인이 되고 있지만 건강보험이 통합돼 의료비 관리 시스템이 없고 관료화됐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료급여 대상자보다 소득이 조금 높은 차상위 계층은 건강보험에 편입돼 의료 이용을 할 때 본인부담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 같은 문제의 근본원인은 건강보험과 의료제도를 운영하는 기본 틀이 77년 패러다임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77년 패러다임이란 국민소득 1000달러 시대에 기본적인 의료서비스를 전 국민에게 조기에 제공하기 위한 틀을 말한다. 소득 파악이 어려운 지역주민에게 건강보험을 쉽게 적용하기 위해서는 보험료를 낮게 책정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모든 국민에게 건강보험이 제공하는 의료만 이용케 해 형평이 최고의 선이었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 보험관리도 단일화해야 한다며 보험료 부과 방식을 통일하지도 못하면서 재정통합까지 단행했던 것이다.

 기본적 의료의 충족에 급급하던 시절에 형성된 ‘77년 패러다임을 아직까지 붙잡고 있다 보니 의료는 하향 평준화됐고 환자나 공급자 모두가 만족하지 못하는 제도가 됐다.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에는 이에 걸맞은 새로운 틀이 마련돼야 한다.

 우선 차상위 저소득계층은 건강보험이 아니라 의료급여로 의료를 보장해 사각지대를 없애야 한다. 그러한 바탕 위에서 건강보험에 경쟁원리를 불어넣어 효율성을 높여야 한다. 또한 국민에게 건강보험 제도권 밖에서 제공하는 의료를 이용할 선택권을 보장해야 하며, 민영 보험도 활용할 수 있도록 제도를 고안해야 한다. 이를 통해 의료기관들이 박리다매형 의료 공급의 틀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만 한다. 또한 기술과 노동이 집약되는 의료서비스를 국민에게 제공해야 한다. 의료보험이 분배의 볼모로 잡힐 것이 아니라 21세기 우리에게 새로운 먹거리를 제공할 신산업의 역할도 할 수 있다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이규식 연세대 교수·보건행정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