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시론] 2004년에 묻는다 <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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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1987년의 민주화 이후 한국 정치는 최대의 위기에 처해 있다. 이 위기의 가장 큰 원인은 우리 국민이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정치지도자와 세력이 없다는 사실이다. 과거 이승만 시대나 오랫동안의 군부독재 시대에도 국민의 마음 속에는 지지하는 정치지도자와 세력이 있었다. 예를 들면, 목숨을 내걸고 독재정치와 투쟁하던 정치지도자들과 세력이 그런 사람들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국민의 마음 속에는 이러한 정치지도자와 세력이 없다.

국민은 열린우리당이든, 민주당이든, 한나라당이든, 자민련이든 어떤 세력에게도 정치적 희망을 가지고 있지 않다. 국민은 대통령을 존중하고 있지도 않고, 국회의원들을 지지하고 있지도 않다. 국민이 네 당 중 한 당을 지지하고 대통령이나 어떤 의원을 지지한다면 그것은 자기가 싫어하는 세력이 권력을 차지하면 안 된다는 부정적인 의미에서의 지지일 가능성이 크다. 민주당을 지지하면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것이라는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은 우리 국민의 이와 같은 부정적 정치의식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는 발언이다.

현재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정치적 현안들을 볼 때 적극적인 지지의 공백 상태가 2004년에 개선될 전망은 거의 없다. 총선이 4월로 다가왔는데도 여야 의원들은 선거법 개정을 둘러싸고 격돌을 계속하고 있고, 2003년 12월 말까지 선거구 획정을 다시 하라는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무시하고 있다.

법을 만드는 의원들이 자기들의 특수이익을 지키기 위해서는 서로 담합하고 자기들이 만든 법의 위반도 마다하지 않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선거법 개정과 선거구 획정을 둘러싼 추태는 곧 다시 나타날 것이고, 며칠 전 7명의 국회의원 체포동의안을 전부 부결시킨 국회와 의원들에 대한 국민의 분노는 격화될 것이다.

이미 시작된 대통령과 야당 간의 불법선거자금을 둘러싼 공방은 여야의 대결을 죽기살기식 싸움으로 몰아가고 있다. 앞으로 불법 선거자금에 대한 검찰 수사는 확대될 수밖에 없고, 이 문제로 이회창 전 대통령후보가 감옥에 가고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소추를 당하는 문제가 제기될 가능성이 이미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여야 간의 권력투쟁은 극한투쟁으로 치닫고 있고, 여야 정치지도자들과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지지는 땅에 떨어지고 있다.

정치인들은 이라크 파병 문제, 북핵 문제, 한.미동맹 문제 등의 외교적 이슈들도 그것이 우리의 국익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따지기보다 보수와 진보의 이념적 잣대로 재단해 국론을 분열시키고 있다. 노사 간의 관계와 농민들의 문제에 대해서도 정책적 해결방향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정치인들이 국내외적으로 중요한 이슈들을 제도 내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거리의 시위가 거의 매일 일어나고 있고, 이러한 시위는 2004년에도 계속될 전망이다.

올 4월의 총선 결과는 4당과 盧대통령의 장래에 막중한 영향을 미칠 것이나 국민은 특정 정당과 정치인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기보다 모든 정당과 정치인들을 불신하는 자세에서 어느 한 정당과 후보를 마지못해 선택할 것이다. 정치인들에 대한 혐오감이 극에 달해 투표율이 매우 저조할 가능성도 있다.

오늘의 정치상황은 정치인들이 국민을 정치로부터 소외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1960년 4월 민주혁명 이후 제2공화국과 유사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국 경제가 그때와 같이 빈곤상태에 있지 않고 정치외적 도전세력이 없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우리 국민은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그들을 통해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정치지도자와 세력의 출현을 갈구하고 있다. 새해에 바로 지적한 바와 같이 기존의 정치지도자와 세력이 국민의 이러한 기대에 부응하는 새로운 모습을 보이기 어렵다면 한국 정치는 다시 파국을 맞을 수밖에 없는 것인가.

2004년은 한국 정치가 어느 길로 갈 것인가를 결정하는 해가 될 것이다. 일반 국민보다 교육수준이 월등히 높은 한국의 엘리트 정치인들이 파국을 맞지 않고 스스로의 모습을 바꿀 수 있는 지혜를 터득할 수는 없는지 묻고 싶다.

이정복 서울대 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