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포럼] 새해 아침의 기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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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하느님, 갑신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새해 첫날 아침 마을 뒷산에 올랐습니다. 포근한 날씨에 많은 시민도 가족과 함께 등산길에 나섰습니다. 모두가 새해 소망을 하나씩 안고 올랐겠지요. 안개인지, 스모그인지 뿌연 연무가 끼었습니다. 그래도 서울시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바로 눈 아래에 청와대도 보입니다. 새해 아침 평범한 소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하느님께 기도를 올립니다.

지난해는 나라 안팎으로 정말 시련이 많았습니다.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고, 또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들로 한 해가 훌쩍 지나갔습니다. 물론 새해라고 하루 아침에 모든 게 좋아지지는 않겠지요. 벌써 1백20년 전의 갑신정변과 1백년 전의 러.일 전쟁을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풍전등화 같았던 당시 시대상황이 지금과 비슷하다는 거지요. 경제는 여전히 어려운데 선거까지 있어 만만찮은 혼란과 시련이 예상됩니다. 그러나 하느님, 어떻게 세우고 발전시켜온 나라입니까. 예서 주저앉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 민족을 긍휼히 여기소서. 저희가 시련을 딛고 다시 일어서도록 이끌어 주시옵소서.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 저 아래 청와대 주인인 대통령에게 슬기와 용기를 내려 주소서. 물론 현재의 이 모든 어려움이 대통령의 잘못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러나 국정 최고책임자인 그의 책임이 가장 큰 것은 분명합니다. 밉건 곱건 그는 우리가 뽑은 지도자입니다. 그래서 주로 대통령을 위해 기도 드립니다.

새해엔 대통령이 말로써 시험에 들지 않게 하소서. 지난해 가장 유행한 말로 '우왕좌왕'이 뽑힌 데에는 대통령의 말 실수도 큰 기여를 했습니다. 노자의 도덕경에 '다언삭궁(多言數窮)이니 불여수중(不如守中)'이라 했습니다. 말이 많으면 자주 막히는 법이니 마음 속에 담아 밝히지 않음만 못하다는 뜻입니다. 말 한마디를 하기 전에 세번 생각하는 신중함을 그에게 베푸소서. 그래서 더 이상 나라가 갈팡질팡하지 않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대통령이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속말에도 사나이는 평생 세 번 눈물을 흘린다고 했습니다. 다정다감한 것은 좋지만 대통령이 눈물을 자주 보여서야 권위가 서겠습니까. 백성들의 고통에 진정 눈물이 난다면 청와대 뒤뜰에 나가 남몰래 눈물을 훔치도록 그의 발길을 인도하소서.

이젠 친구도 가려 사귀도록 그에게 사람 보는 혜안을 허락해 주소서. 어려운 시절 도와준 친구를 잊지 못하는 게 인지상정이겠지요. 그러나 끼리끼리의 폐해는 지금까지로 충분합니다. 이젠 386이나 노사모뿐 아니라 원로들의 쓴 말씀에도 귀 기울이는 총명함을 그에게 내려 주시옵소서. 이 사회 주류 층에서 친구를 많이 사귀도록 그를 이끄소서.

4월 총선에서 그가 이긴다고 교만해지지 않게 하옵시고, 지더라도 정직한 패배에 부끄러워하지 않게 하소서. 손쉬운 편가르기보다는 힘든 중재자.통합자의 길로 그를 인도하소서. 잘못된 공약이라면 과감히 취소하고 국민에게 사과하는 용기를 그에게 내려 주시옵소서. 국민을 위해서라면 리비아의 카다피처럼 '발가벗는' 참용기를 그에게 내려 주소서.

아집과 독선보다는 상식과 순리를 따르는 명석함을 그에게 주시옵소서. 정치뿐 아니라 경제와 민생도 챙기도록 그를 인도하소서. 그리하여 더 이상 기업들이 외국으로 탈출하지 않고, 더 이상 조국을 등지는 이민들이 생기지 않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서민들의 입에서 한숨이 아니라 신명소리가 나오도록 하시옵소서.

그리하며 올 연말에는 모두가 보람찬 한 해였다고 느낄 수 있도록 해 주시옵소서. 하느님, 다시 한번 간절히 기도하나이다. 부디 우리 민족을 굽어 살피소서. 아멘.

유재식 문화.스포츠담당 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