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리인하 무색한 뒷돈 대출(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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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금융혁신을 추진해야할 주체세력이 누구인가는 분명하다. 바로 정부다. 기업은 은행이 대출커미션을 없애는데 앞장서야 한다고 주장하고,은행은 정부가 자율화 정책을 통해 불건전 관행의 고리를 끊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어째서 우리는 각종 금융기관으로부터 돈을 빌릴때 정당한 이자를 지불하고도 강제저축까지 들며 거기에 또 사례비를 얹어주고 끊임없이 사은품도 제공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을 갖는다. 정부는 뒷돈을 주지 않으면 돈을 빌릴 수 없는 현실에서 금리인하가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엄중히 따져봐야 한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산하 한국경제연구원과 서울대 경영연구소가 내놓은 금융관행 실태조사 결과는 대출을 둘러싼 구조적 부조리가 거의 치유불능 상태에 와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대기업 뿐만 아니라 중소기업들도 대출금의 최고 10%에 이르는 커미션을 제공하고 있으며,이런 관행이 시중은행 및 단자사에까지 뿌리박혀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선진 금융기법을 도입한 일부 외국계 은행들조차 국내 은행들과 비슷한 불건전 거래행태에 빠져 있다는 사실이다.
이같은 망국적 관행은 어떻게든 고쳐야 한다. 그것은 전적으로 정부 금융행정 당국자의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자세에 달려있다. 누가 변혁을 지휘해 나갈 것인가 못지않게 어느 조직이 변화의 여건을 조성해 갈 의욕을 가지고 있는가가 중요하다. 대출을 미끼로 한 뒷돈거래는 그동안 거의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같은 관행이 각종 금융사고를 빚어낼 때마다 정부는 특별검사를 실시했고,대출관행 개선을 위한 범정부 차원의 행정규제 완화대책을 발표하곤 했다. 그러나 이런 조치 자체가 일상적인 행사에 그쳤을 뿐이다. 금융자율화를 부르짖고 국제적 규범의 준수를 강조하면서도 한편에서는 엄청난 뒷돈 거래가 계속됐다.
만성적인 자금의 초과수요 상황에선 금융기관과 고객 사이의 불건전한 거래의 소지는 매우 크다. 때문에 공정금리 이외의 기업의 추가비용 부담도 쉽사리 가벼워지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한 나라의 실물부문은 금융부문의 활동이 얼마나 건전하느냐에 크게 좌우된다. 우리에게도 국민경제적인 차원에서 적절하고도 강도있는 금융개혁이 이뤄지지 않으면 세계경제의 흐름을 따라잡을 수 없다.
무역자유화 과정을 마무리하면서 금융부문의 단계적인 개방은 필연적이다.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정부는 경제성장의 발목을 죄고 있는 금융부조리를 뿌리뽑아야할 주체세력이다. 새 정부가 바로 그 일을 이어받아야 한다. 모두가 알면서도 모두가 모르는 채 넘어가는 이런 불건전 관행의 개선없이는 한국병 치유도,경제의 회생도 있을 수 없음을 인식하고 금융부조리를 뿌리뽑는 전기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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