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러리」체제(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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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우리 속담엔 「마누라 자랑은 팔불출의 하나다」라는 것이 있지만 서양사람들에겐 「똑똑한 마누라」를 둔 것이 큰 자랑일 수 있고,그것이 남편을 출세시키는 지름길이 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서양에서도 아내쪽의 재능이 여러모로 남편을 앞지르고 매사에 남편보다 두드러지게 보이는 경우 오히려 남편의 존재의미를 상대적으로 약화시키고 자신감을 상실케하는 장애적 요소로 작용하게 하는 예도 흔하다.
재색을 겸비한 마리 앙투아네트왕비의 빛에 가려 정치에 흥미를 잃고 이상한 취미에 몰두하다가 끝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프랑스의 루이16세가 그렇고,같은 시기에 내무대신의 부인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다가 역시 사형당한 롤랭부인이 그렇다. 아내쪽의 정치적 야심이 남편쪽의 그것을 능가하다보니 모든 것을 자신보다 윗길인 아내에게 맡기고 유유자적하다가 맞은 비극적 결과들이다.
현대사회에서야 아내의 재능도 함께 살려나가는 것이 효율적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작년 가을 미국대통령 선거전이 한창일때 「나를 대통령에 당선시키는 것은 힐러리라는 또다른 유능한 사람을 함께 얻는 것」이라는 클린턴후보의 캠페인이 유권자들에게 설득력있게 먹혀들어간 까닭도 거기에 있다.
그러나 클린턴대통령이 취임하고 나서 그 부인 힐러리의 위상에 대한 기류가 심상치 않은듯 하다. 대통령은 클린턴인데도 퍼스트레이디의 「내주장」이 너무 강해 대통령의 귀가 엷어지는게 아니냐 하는 것이다. 앞으로 미국의 정치가 대통령의 이름인 빌과 힐러리를 합친 「빌러리 체제」에 의해 움직여지지 않느냐 하는 소리도 나오고 있다.
그 징후는 이미 이들 부부가 대통령출마 준비를 시작했던 91년 여름부터 나타났다. 리틀 록의 아칸소주지사 관저 주방에서 열리곤 했던 비공식 조찬모임을 가리켜 언론들은 「주방내각」이라 불렀었다. 왜 하필이면 「주방」이냐는 것이다. 클린턴이 대통령에 당선되고 난 직후 「위원회라면 신물난다」고 공언했던 힐러리가 의보제도개혁안 마련을 위한 특위위원장에 임명된 것도 유권자들에게는 곱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 같다. 「빌리러 체제」의 앞으로의 모습이 궁금하다.<정규웅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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