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보사 공익기금 "법 때문에…"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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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생명보험 업계의 ‘공익기금’ 조성에 빨간불이 켜졌다. 관련 법규가 제대로 정비돼 있지 않아 여러 기업이 돈을 모아 하나의 재단을 만드는 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협회가 각 생보사로부터 출연받는 공익기금은 거액의 증여세를 내야 한다. 이런 문제들을 다 해결한다 해도 문제는 또 남는다. 공익사업을 하나씩 꾸려갈 때마다 관계되는 관청의 허가를 일일이 받아야 한다. 사업 하나에 수십 개 관청의 도장을 받다 보면 일이 제대로 진행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10월부터 1조5000억원 규모의 사회공헌기금을 조성해 공익사업을 펼치려던 생명보험 업계가 해법 마련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기금을 갹출해 ‘사회봉사’에 쓰려 해도 관련 법이 받쳐 주지 않는 것이다.

 ◆미흡한 법 체계=개별 기업이 특정 부문의 사회공헌 사업을 하는 데는 현행법상 큰 문제는 없다. 하지만 여러 기업이 돈을 모아 하나의 재단을 세운 뒤 다양한 공익사업을 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여러 종류의 공익사업을 하려면 사업별로 수많은 관할 관청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기금을 갹출하는 것도 쉽지 않다. 증여세를 내야 하기 때문이다.

 생보 업계는 법 테두리 안에서 공익기금을 활용할 다양한 방안을 모색해 봤다. 우선 개별 회사별로 공익사업을 집행하는 방안이었다. 하지만 이는 업계 공동의 공익사업 추진이라는 대의명분을 약화시킬 뿐 아니라 공정성과 투명성 논란을 일으킬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채택되지 않았다.

 다음은 생보협회 내 별도의 사회공헌기금 설치였다. 생보협회 내에 각 생보사의 사회공헌 사업을 관리·감독하는 공익사업추진위원회를 두고 이곳에서 사업계획을 승인하는 식이다. 개별 생보사가 기금을 특별회비 형태로 출연하면 특별회비는 법인세법상 지정 기부금에 해당돼 손비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점에 착안했다. 그런데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관련 법상 특별회비로 받은 금액은 증여세를 내야 했기 때문이다. ‘상속세 및 증여세법’에 따르면 ‘재정경제부령이 정하는 (공익)사업’에는 생보협회의 공익사업이 포함돼 있지 않다. 결국 생보협회로선 법을 바꾸든가, 거액의 증여세를 내든가 해야 하는 것이다.

 ◆묘안 못 찾아 ‘섞어찌개식’ 운영키로=생보 업계는 마지막으로 공동으로 별도 법인을 설립해 운영하는 방식을 집중 검토했다. 이는 기금 출연자(생보회사)와 운영 주체를 분리해 공정성과 투명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이 방안도 ‘허가’라는 암초에 걸렸다. ‘공익법인의 설립·운영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하나의 법인이 여러 개의 공익사업을 할 수는 있으나 사업마다 주무관청(금융감독위원회·교육인적자원부·보건복지부·문화관광부 등)에 설립 허가를 받아야 한다. 생보협회는 환경호르몬 예방, 저소득자 무료 건강검진, 자살 방지, 장애인 출산·육아 지원, 공익성 보험상품 개발과 같은 23개 사업을 펼칠 계획이다. 한 재단이 이렇게 많은 사업을 하면서 사업별로 주무 관청의 ‘사전 승인’을 받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정부도 여러 종류의 공익사업을 하는 공익재단 설립에 부정적이다. 한 재단에서 여러 가지 공익사업을 할 경우 어느 사업이 주된 사업인지 판별할 수 없기 때문에 주무 관청을 선정할 수 없다는 게 이유다.

 생보 업계 관계자는 “관련 법상 문제가 많아 한 가지 형태가 아니라 사업 성격에 따라 기금도 운영하고 공익재단도 설립하는 ‘섞어찌개식’으로 사회공헌 사업을 추진하기로 의견을 모았다”고 말했다. 어느 것 한 가지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니 세 가지 방안을 섞어 법이 허용하는 만큼만 ‘사회공헌’을 하겠다는 것이다.
 
김창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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