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성기 시절의 구옥희 프로.
구옥희는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KLPGA) 투어에서 20승, 일본여자프로골프협회(JLPGA) 투어에서 23승, 그리고 미국 여자프로골프협회(LPGA) 투어에서 1승을 올렸으니 한국 최고의 여자 프로골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녀는 집안 형편은 넉넉하지못했다. 구 선수는 경기도 고양 삼송리 근처에 살았다. 고교를 졸업하자마자 캐디로 골프와 인연을 맺었다. 1976년 쯤 그녀가 남서울컨트리클럽에서 근무하고 있는 나를 찾아왔다.
“골프를 배우고 싶습니다.” 처음엔 키도 작고 해서 “이렇게 체격이 작은 애가 골프를 잘 할 수 있을까”하고 달갑지 않게 생각했다. 하지만 날 찾아왔으니 이것도 인연이다 싶어 “골프로 성공하려면 보통 열심히 해서는 안 된다. 다른 사람보다 두세 배 노력해야 한다. 내가 하자는 대로 100% 따라 하겠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녀는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나는 두 가지를 요구했다. 첫째는 쇠파이프 훈련이었다. 남자도 휘두르기 힘든 무거운 쇠파이프를 하루 50~60번씩 휘두르도록 했다. 팔 근육을 키우기 위한 훈련이었다. 둘째는 자전거를 타고하루 3~4km를 달리라고 했다.
그녀는 지독했다. 쇠파이프 휘두르기를 하루 100번도 넘게 했다. 자전거 타기는 물론이고 매일5km를 뛰었다.
구옥희가 남서울컨트리클럽연습생이 돼 공을 어느 정도 치게 됐을 때 나는 그와 김덕주 프로를 데리고 많은 연습라운드를 돌았다.
나는 구옥희에게 “네가 유명선수가 되려면 나한테 9홀에 2,3점을 받고 이겨야 한다. 그러면일본에서도 통할 거다”라고 조언했다.
1~2년 뒤 그녀의 실력은 급성장했다. 때로는 화이트 티에서 이븐파를 치기도 했다. 무엇보다 연습량이 엄청났다. 남자 프로도 못 따라 갈 정도의 맹훈련을 했다. 나의 젊은 시절 연습량을 웃돌았다.
KPGA는 78년부터 여자 프로를 모집했다. 그때 구옥희가 가입했고, 한명현ㆍ강춘자 등이 모였다. 하지만 10명이 채 안 됐다.
이게 KLPGA의 출발이기도 하다. 이듬해부터 KPGA는 남자대회와 여자 대회를 함께 열었고,구옥희는 그해 쾌남오픈에서 우승하면서 국내 무대에선 독보적인 존재가 됐다. 그와 맞설 선수 가 없었다.
한장상 KPGA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