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보고 있으면 안 된다" 교육부 통첩에 교수들 단체행동 논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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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오후 4시 고려대 교내 모처. 이 학교 교수의회 상임위원 9명이 모였다. '내신(학생부) 실질반영비율을 50%로 높이라'는 교육인적자원부의 지침에 대한 교수들의 입장을 정리하기 위해서다. 모임은 노무현 대통령이 152개 대학 총장을 청와대로 불러 일장훈시를 한 지 약 두 시간 뒤에 시작됐다. 교육부는 물론 대통령의 의지에 반하는 집단행동으로 비춰질 수 있는 상황이다. 모임에선 거침없는 이야기가 오간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의 간섭이 도를 넘어섰다는 얘기가 많이 나왔다고 회의 참석자는 전했다. 상임위원들은 교수의회 전체회의를 소집하기로 하고 회의를 마쳤다. 정부가 실질반영비율을 높이지 않는 대학을 제재하겠다고 최후통첩을 한 이후 처음으로 교수들의 집단 반발이 시작된 것이다. 고려대 교수들의 움직임은 적지 않은 파장을 불러올 전망이다.

◆연초부터 교육부와 갈등=고려대는 2월 수시 모집에서 출신 고교별로 내신 점수를 차등 적용하겠다고 밝혔다. 교육부는 "3불(본고사.고교등급제.기여입학제 금지) 정책을 어기고 고교등급제를 적용하는 것 아니냐"며 이 대학을 압박했다. 고려대는 각 학교 졸업생의 성적을 기초로 한 것이 아니라 각 학교의 시험 난이도를 평가에 반영하는 것이라는 설명으로 교육부의 공격을 피했다. 고려대는 정시 모집 정원의 50%를 수능 점수로만 선발하는 계획도 발표했다. 내신을 중시해 학생들을 선발하라는 교육부의 방침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었다. 고려대의 이런 움직임은 다른 대학에도 영향을 줬다. 수능 위주의 학생 선발은 성균관대.연세대.이화여대.한양대로 확산됐다.

교육부가 내신 실질반영비율 50% 적용을 강요하자 고려대는 올해 입학생의 성적으로 시뮬레이션한 결과를 내놓으며 불합리성을 지적했다. 내신 성적이 지나치게 당락을 좌우해 입학생 중 56%가 불합격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고 주장했다. 고려대는 21일 6개 주요 사립대 입학처장이 교육부 정책에 대한 반대 성명을 내는 데에도 주도적 역할을 했다.

◆다른 대학은=고려대 K교수는 "다음달 4일 열리는 교수의회에서 성명서가 채택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가만히 있으면 안 되고 뭔가 강한 의사표시를 해야 한다'고 말하는 교수가 많다"는 것이다. 신중론을 펴는 교수도 있다. 교수의회 의장인 김민환 교수는 "교수마다 입장이 조금씩 다르며 일단 추이를 지켜보자는 교수도 있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교수는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챙기는 일에 대놓고 반대하기가 쉽겠느냐"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교수는 정부의 방침이 대학의 자율을 침해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고려대 교수들의 집단행동은 다른 대학에 영향을 줄 가능성도 있다. 아직 다른 대학에서 감지되는 움직임은 없다. 그러나 교육부 방침에 강하게 반발하는 서강대.성균관대.연세대.이화여대 등 주요 사립대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서강대 김영수 입학처장은 "8월 20일까지 정시모집의 구체적 모집 요강을 내라는 교육부의 지시를 이행할 수 있을지를 검토하고 있다"며 "아직 학교의 입장이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다. 다른 사립대의 입학처장은 "교육부의 행정.재정적 불이익 조치를 감수하고라도 자율적으로 학생을 선발할지를 우선 내부에서 협의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상언.박수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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