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있는아침] ‘아주 가까운 피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5면

 어렸을 적 낮잠 자다 일어나 아침인 줄 알고 학교까지 갔다가 돌아올 때와
 똑같은, 별나도 노란빛을 발하는 하오 5시의 여름 햇살이
 아파트 단지 측면 벽을 조명(照明)할 때 단지 전체가 피안 같다
 내가 언젠가 한번은 살았던 것 같은 생이 바로 앞에 있다
 
 어디선가 웬 수탁이 울고, 여름 햇살에 떠밀리며 하교한 초등학생들이
 문방구점 앞에서 방망이로 두더지들을 마구 패대고 있다


 
  한 농촌에서 한낮의 수탁 울음을 듣고 서산은 전율했다. 볏 같은 저 외침은 무슨 연고인가. ‘일성계(一聲鷄)’를 들으면 대장부는 할 일을 마친다 했다. 이 모든 게 꿈일까. 까마득한 기억의 한 티끌과 영원 저 바깥을 잇는 통섭의 시. 오후 5시의 조명은 아파트 벽면에 가로막혀 마음을 들킨다. 일생이던 육체의 환몽 속에 소년들은 지나간다. 이 잠시의 피안은 황지우의 혈흔이다.

<고형렬ㆍ시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