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당 유세장 인파와 「현대」/고대훈 특별취재반(대선교차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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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주말인 12일 서울 여의도와 13일 경남 울산유세에서 「현대인」들이 창업주 정주영 국민당후보에게 보여준 성원은 인정의 차원에서는 감동적이었다.
현대인들은 쏟아지는 빗줄기를 피해 비닐을 뒤집어쓴채 몸에 스며드는 냉기를 견뎌냈고 발과 손마디가 얼어 감각이 마비되는 세찬 추위에서도 너댓시간씩 자리를 지키며 정 후보를 연호했다.
20대 여사원으로부터 50대 중역에 이르기까지 수십만의 「현대가족」들은 정 후보라는 가장의 대형사진과 피킷·플래카드를 치켜들며 사나운 날씨를 견뎌냈다.
『반만년 우리 역사속에서 정 후보 같은 사람은 2백여년만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하는 위대한 지도자』라는 김동길최고위원의 극찬에 『정주영,대통령』을 외쳐대는 이들의 모습은 차라리 종교의 경지였다.
노조파동을 겪으며 왕회장님(정 후보)을 손가락질 하던 불과 몇년전의 일은 아득한 과거에 불과했다.
청중의 대다수를 차지했던 현대인들은 예전과 달리 굳이 직원임을 숨기려하지 않았다. 오히려 『현대탄압이 우리 경제를 흔들리게 한다』며 현대중공업의 비자금유입사건을 관권개입이라고 목청을 드높였다. 또 선거보도가 다른 당의 금권선거는 묵인하고 자신들의 회사문제만 캐내는 「관제언론」이라며 학생운동권이 애용하는 용어로 몰아붙였다.
스물을 갓 넘은 여사원조차 『쓰러져가는 경제현실과 썩은 정치판을 되살릴 수 있는 분은 왕회장님밖에 없어요』라고 정 후보의 목소리를 판에 박은듯 되뇌었다. 어느덧 이들에게 「정 후보 낙선=현대 파멸」이라는 운명공동체적 절박감이 팽배해져 개인의 선택보다 집단이 우선되며 함께 한곳으로 가야만 하는 「현대신드롬」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현대인들이 정치·경제적 현실에 회의를 느껴 변화를 바라는 선택으로 공교롭게 창업주 정 후보를 최적격이라고 판단,선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양김씨로 대표되던 영호남의 지역간 갈등이 채 아물기도 전에 「현대=현대인=정주영」이라는 불가분의 연결고리가 한 사람을 위해 맹목적 집단주의로 변질돼갈 때 미칠 사회적 후유증은 또다른 숙제로 남을 것이다.<여의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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