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사촌(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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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조선왕조때의 향약은 권선징악을 토대로한 마을의 자치규약이다. 명종때 이황의 예안향약과 선조때 이이의 해주향약이 대표적이다. 향약의 주된 정신은 네가지로 덕업은 서로 권하고,과실은 서로 규제하며,예속은 서로 나누고,환란은 서로 구휼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하자면 「함께 사는 사회,더불어 사는 삶」의 정신이다. 그 가운데 흥미로운 것이 있으니 「한 마을에 굶거나 어려움에 빠져 있는 사람이 있는데도 이를 못본체 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를 차상벌에 처한다」는 대목이다. 차상벌은 보통 태형 30도였다.
이웃의 어려움을 돌보지 않는 사람을 벌로 다스림으로써 서로 도우며 사는 미풍양속을 살려나간다는 취지였으나 이웃의 어려움에 등을 돌리는 사람은 향약에 의한 벌을 받기 전에 먼저 마을사람들로부터 비인간으로 낙인찍혀 따돌림당했다. 우리 전통사회에서 이웃을 사랑하는 정신은 그렇게 나타났다. 별미음식을 장만했을 때 서로 나누어 먹는다든지 길흉사나 농번기때 서로 품앗이하는 것도 우리네 삶의 아름다운 풍모였다. 「이웃사촌」이라거나 「이웃이 먼 친척보다 가깝다」는 말도 우리네 삶에 있어서 이웃의 각별한 의미를 새삼 일깨운다.
그러나 사회구조가 복잡해지고 이기주의가 팽배하면서 이웃사랑의 정신은 나날이 퇴색하고 있다. 같은 아파트에서,혹은 담을 사이에 두고 매일 얼굴을 맞대며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서로 모른체 하는 것이 오늘날의 이웃이다. 학력수준이 높을수록,고소득층일수록 이웃관계가 더욱 소원한다는 통계도 나와 있다. 이웃이 없는 고립된 폐쇄적 삶들이다.
이웃간에 주차시비 끝에 살인사건이 벌어지는가 하면,연립주택에서 혼자 세들어 살고 있던 노인이 연탄가스중독으로 사망했는데도 보름이 되도록 발견조차 되지 않았던 일따위가 오늘의 이웃관계를 한마디로 대변한다. 엊그제는 이웃간에 벌어진 개싸움이 주인싸움으로 발전해 사람이 다치는 웃지못할 사건도 발생했다. 이웃간에 공동체적 정신이 피폐해졌을 때 우리들의 삶이 얼마나 메마르고 각박해지는가를 인식해야 한다. 향약처럼 불우한 이웃을 보고도 못본체 하는 사람들을 태형에 처하는 법이라도 만들면 어떨까.<정규웅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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