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16)제88화 형장의 빛 박삼중(5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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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부산변호사회 총무인 박준석 변호사가 대구교도소에 가시는 걸음에 한 사형수를 좀 만나봐 주세요』하면서 부탁해 왔다. 그 사형수는 박 변호사가 무료변론을 맡아 최선을 다해 변호했으나 결국 사형이 확정됐다는 것이었다. 죄목은 자신의 아내와 다른 한 남자를 살해한 것이었다. 지금 대구교도소에 있는 권갑석(45)이 그 주인공.
사형이 확정되자 권은 박 변호사에게 깍듯이 인사하면서『변호사님 감사합니다」고 말했다 한다. 과실로 인한 사고사라면서 본인이 살인죄를 끝까지 부인했고 직접적인 증거나 사람을 죽일만한 동기가 별로 없어 박 변호사에게는「사형확정」선고가 내심 미안한 일이었는데 오히려 고맙다는 피고인의 모습이 기억에 남아있었다. 그러던 차에 권으로부터 계속 편지가 왔다.
편지에는 어쨌든 자신 때문에 사람이 둘이나 죽었으니 자신의 사형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죽을 준비를 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박 변호사는 형이 확정된 뒤 7년 동안이나 꼬박꼬박 보내오는 권의 편지를 받을 때마다 가슴이 아팠다. 그래서 나에게 그 사형수를 만나보고 도대체 진실이라도 들어봐 달라고 한 것이다.
나는 신의가 있는 박 변호사의 인간성에 반해 사형수 권을 만나러 갔다. 법무 과장실에 들어서는 그는 키가 컸다. 싱긋 미소지으며 여유 있는 모습으로『우리같이 불행한 사람을 위해 애쓰시는 스님이 저를 위해 시간을 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고 인사를 했다.
나는 박 변호사의 애틋한 마음을 전하면서 억울한 부분이 있으면 나에게 얘기해 달라고 했다. 그러자 그는『저는 죽음을 맞을 준비를 끝냈습니다. 나 때문에 사람이 죽었으니 제가 책임져야 합니다. 마음은 고마우나 그냥 두시라고 전해 주십시오』라고 했다.
그는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답지 않았다. 지난 얘기는 한마디도 않고 평온한 모습을 보였다. 그는 곧『들어가 보겠습니다. 저보다 더 불행한 사람을 위해 애 많이 써 주십시오. 고맙습니다』하면서 먼저 일어섰다.
권은 85년 6월24일 부산에서 구속됐다. 평소 알고 지내던 여인의 남편을 죽이고 이를 눈치 챈 자신의 아내까지 잇따라 죽였다는 것이 그의 혐의 내용이었다. 그러나 권은 처음부터 고문에 의한 조작이라면서 이를 부인했으나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증인이 끝내 나타나지 않아 사형수가 되고 말았다. 자신을 종교에 귀의시킨 수녀를 만나서도 아내 살인은 말다툼하다 밀친 것이 그만 그렇게 된 것이고 알고 지낸 여인의 남편도 차 사고로 죽은 것이라고 고백했다.
재판에 진 박 변호사는『정황이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 재판해야 한다』는 원칙에 위배된 판결이 내려졌다고 아직도 믿고 있다.
1심 판결 후 86년 세모 때 담당판사였던 김모씨는 권앞으로 편지를 보냈다.『귀하의 행위에 대해 국법에 따라 형을 선고했으나 인격을 정죄한 것은 아님을 분명히 밝힙니다』라면서 신앙을 가질 것을 권했다. 권도 편지를 보냈다. 가혹한 형벌로 그를 단죄한 판사에게도 『고맙다』는 주조로 편지를 썼다. 김 판사의 따뜻한 정과 인품을 존경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권은 김 판사와 7년 동안 편지를 교환해 오고 있다. 기독교 신자인 김 판사가 보낸 성서 한 권이 계기가 되어 권은 신앙의 길을 걷게 됐다.
권에게는 대학생인 맏아들과 두딸이 있다. 또 병환중인 노부모도 있다. 교사 생활하는 여동생은 결혼도 미룬 채 생활비를 대고 있다. 대구에는 권의 구명 운동을 펼치는「새 생명회」모임이 있다. 권과 함께 잠시 미결로 있었던 사람들이 그 안에서 권에게서 받은 인간적인 감동 때문에 권을 위해 탄원서를 준비하고있다. 나도 곧 김 판사를 만날 생각이다. 살려야 할 가치가 있는 생명이라면 어떻게든 살리도록 힘쓰고 싶다. 매일 죽음 한가운데에 있는 그에게 따뜻한 빚 한줄기가 비춰지기를 기원해 본다.【박삼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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